[표지이야기]비극적 사건 터질 때마다 국가 책임 차츰 확대… 자녀 징계권은 2021년에야 폐지
2022년 4월2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을 찾은 시민들이 입양한 부부의 학대로 생후 16개월에 숨진 ‘정인이’를 추모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양어머니에게 징역 3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는 뼈가 앙상한 여섯 살 아이가 석고상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1998년 4월, ‘훈육을 위한 사랑의 매’ ‘생활고로 일가족 동반자살’과 같은 표현이 많이 쓰이던 때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이들은 “무슨 일이냐”고 항의하는 엄마를 뒤로한 채 팔을 벌려 아이를 안았다. 다리미로 지져진 등, 진물이 흐르는 발…. 마당에는 아이의 누나가 암매장돼 있었다.
방송사 카메라까지 출동해 현관문 안쪽에서 벌어지던 ‘아동학대’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린 최초 사례였다. 이른바 ‘영훈이 사건’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고 사회는 비로소 조금씩 움직였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아동학대와 분리 보호의 개념, 아동보호전문기관 설치의 법적 근거, 아동학대 신고 의무 등은 모두 이 남매의 비극을 바탕으로 2000년 전면 개정된 아동복지법을 근거로 한다.
‘아동복지법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아이가 죽고 나서야 아동·청소년을 보호하는 법체계가 조금씩 발전해왔다는 이야기다. 거꾸로 생각하면, 아이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좀처럼 어른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1962년 1월 ‘학대’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아동복리법’이 시행된 이래, 63년 동안 한국 사회는 철저히 저 끔찍한 문장을 뒤따르고 있다.
‘영훈이 사건’이 2000년 아동복지법 전면 개정을 이끌었다면 2014년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정을 이끈 것은 울산 울주군의 초등학교 2학년 서현이의 죽음이었다. 2013년 10월 가을 소풍날, “소풍에 가고 싶다”고 했다가 엄마에게 맞아 갈비뼈 16개가 부러진 채 사망한 서현이는 이미 여섯 살 때 유치원 교사가 멍을 보고 “학대가 의심된다”며 신고하는 등 최소 다섯 차례 ‘구조 신호’가 포착됐다. 하지만 결국 학대로 사망해 ‘아동 보호 및 가해자 처벌 체계’의 큰 구멍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신고된 아동조차 구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자 국회의원과 민간이 나서 ‘울주 아동학대사망사건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를 꾸렸다. 사회복지학계와 아동복지 관련 단체, 법학계와 시민사회단체까지 위원으로 참여해 ‘이서현 보고서’를 작성했다. 학대 사망 아동에 대한 국내 첫 보고서였다. 2013년 11월부터 2014년 1월까지 보건복지부, 아동보호전문기관, 지방자치단체, 유치원, 학교, 진료 의사 등 24곳의 기관과 개인을 조사했다.
처참한 서현이의 생애와 장기간 집요했던 엄마의 폭력이 드러나면서 특례법 제정은 속도를 냈다. 2014년 9월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됐다. 이 시기부터 아동학대가 범죄라는 개념이 명확해지고 학대로 아이를 사망케 했을 때 형법의 살인죄가 적용됨이 명시됐다. 덕분에 1심 재판에서는 ‘상해치사죄’를 적용받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서현이 엄마는 2심에서 ‘살인죄’가 적용돼 18년형을 받았다. 2011년 세 살 아들을 죽이고 유기한 부모에게 징역 5년형과 기소유예를 결정했던 법원과 검찰의 사례와 비교하면 큰 진전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여전히 아동학대에 관한 국가 통계조차 민간에만 의존할 정도로 ‘아동 보호 체계’가 허술한 상태였다. 부족한 인력과 늘어가는 신고에 24시간 업무에 허덕이는 상담원들은 신고된 지 오래된 아이들을 ‘지속 관리’할 여력이 없었고 구조해낸 아이들을 보호할 학대피해아동 전담 보호시설(5~7명이 생활하는 소규모 공동생활가정)도 전국 36곳에 불과했다.
그다음 아동복지법 개정과 초등학교 장기결석자 전수조사를 이끈 것은 2015년 12월, 맨발로 집을 탈출한 11살 소녀 덕분이었다. 집 안에 감금돼 학대당하다 베란다를 통해 탈출한 아이가 발견된 곳은 집 근처 슈퍼마켓이었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16㎏. 그 나이대 표준체중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초등학교도 계속 결석했지만 제 발로 탈출에 성공할 때까지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교육부는 그제야 전국 초등학교 장기결석아동 전수조사에 나섰다. 결과는 처참했다. 5900개 초등학교에서 220명의 장기결석아동이 파악됐다. 2016년 1월, 4년째 장기 결석 중이던 경기도 부천의 초등학생이 인천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미취학 아동 및 중학교 장기결석자까지 조사 범위를 확대했다. 보건복지부도 영유아 건강검진이나 예방접종 기록이 없는 4~6살 영유아 809명의 조사에 착수했다.
정부는 2016년 아동복지법을 개정해 아동학대 대응사업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지정했다. 아동보호 체계의 ‘공공성’이 강화됐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아동종합실태조사에 나서도록 하고 아동 보호 조치에 시도지사의 의무를 명확히 했다. 또 전담 공무원을 둬서 보호조치 종료로 가정에 복귀한 아동에 대해 사후조치를 하도록 했다. 피해 아동의 보호자인 아동학대 행위자의 협조 의무화, 아동보호전문기관 내 진술녹화실 설치, 학대피해아동쉼터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도 이때 이뤄졌다.
이후 정부는 야심 차게 ‘빅데이터를 활용해 학대 고위험군 아이들을 발굴하겠다’며 2018년 ‘이(e)아동행복지원시스템’을 도입했다. 예방접종 미접종, 건강검진 미검진, 장기결석, 건강보험료 체납 등 44종의 사회보장 정보를 분석해 학대 피해 의심 아동을 발굴한 뒤 가정 방문 등 대면 조사에 나서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초기 3년 동안의 대면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21년 초 ‘정인이 사건’은 그런 분위기 속에 뒤늦게 발견됐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생후 8개월 여자아이를 입양한 부모가 아이를 장기간 심하게 학대해 16개월이 됐을 때 죽음에 이르게 했고 죽기 전까지 총 세 번의 신고가 있었지만 누구도 정인이를 살리지 못했다. 그 과정이 방송을 통해 세세하게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정부는 아동학대 대응체계 강화 방안(2021년 1월), 아동학대 대응체계 보완 방안(2021년 8월) 같은 대책을 발표했다. 학대피해아동 즉각 분리, 아동보호전문기관 및 학대피해아동쉼터 확대 설치,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 조기 배치 등의 내용이었다. 2022년 ‘보건사회연구’에 실린 ‘아동학대사망사건 분석 제도 도입에 관한 연구’(정선욱 등)를 보면 “매우 안타깝게도 아동학대 대응방안은 큰 사건이나 사망사건 이후에 발표되는 경우가 많다”며 “사망과 사망 후 대책이 계속 발표되고 있음에도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동학대, 아동학대 사망을 둘러싼 근본적인 시스템, 즉 아동보호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고 분석했다.
현재 정부가 매년 발행하는 ‘아동학대 주요통계’는 2018년 통계치부터 체계를 잡았다. 방임, 정서적 학대, 자녀 살해 후 자살, 영아 살해 등의 개념이 ‘아동학대’ 테두리에서 정리되고 통계 수치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재학대(5년 이내 다시 신고) 통계의 중요성도 부각됐다.
학교와 가정에서 훈육을 빙자한 폭력이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74년에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체육교사가 학생을 때려 뇌진탕으로 숨지게 했음에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88년 국민학교 교사의 학생 구타 사건에 대해 2심 재판부가 1심의 무죄판결을 뒤집고 벌금형을 내린 것이 첫 유죄 판단이다. 2011년 3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며 ‘학교에서의 학대’는 간신히 금지됐다. 부모의 학대에는 더 관대해 민법상 자녀 징계권(민법 제915조)은 2021년 1월에야 폐지됐다. 1958년 2월 제정된 뒤 63년 만이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민법이 개정돼 부모라도 아동을 체벌할 권리는 없으며, 아동에게 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 등을 하면 최대 10년 이하 징역 등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동학대가 의심되면 112에 신고하고, 아동 양육·지원 등에 어려움이 있으면 129(보건복지상담센터)와 상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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