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가 공식 시작됐던 2020년 1월31일 영국 런던에서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영국 국기를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3일 영국이 2016년 6월23일 국민투표로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9년이 됐다. 유럽연합과 협상을 거쳐 공식 탈퇴한 2020년 이후로는 5년이 지났다. 그러나 유럽연합과 이별을 선언했던 영국은 최근 유럽연합과 다시 밀착하고 있고, 영국 여론은 술렁이고 있다.
지난달 19일 영국이 유럽연합과 맺은 ‘관계 재설정’ 합의는 브렉시트 뒤 유럽연합과 영국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혼란스러운 영국인들이 감정을 분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합의는 영국과 유럽연합이 안보와 무역·출입국 관련 등에서 관계를 강화하는 내용인데, 영국은 합의를 위해 상당 부분을 유럽연합에 양보해야 했다. “영국이 유럽연합에 고통스러운 양보를 했다”, “총리가 유럽연합에 나라를 팔았다”, “굴욕의 시작일 뿐이다”와 같은 키어 스타머 노동당 정부에 대한 원색적 비난이 영국에서 쏟아졌다.
유럽연합 회원국의 선박이 영국 해역에서 조업하는 것을 2038년 6월까지 허용하기로 한 합의가 대표적인 비난거리가 되었다. 어업이 영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04%에 불과하지만, 브렉시트 논의 과정에서 영국의 ‘독립국가’ 상징으로 떠오르며 민감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관계 재설정 합의에 포함된, 청년(18~30살)들이 영국과 유럽연합을 오갈 때 여행과 취업을 쉽게 하는 ‘이동성 합의’도 민감한 문제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유럽연합 시민의 역내 국가 간 통행 제한을 없앤 솅겐조약 적용 지역에서 제외됐다. 이는 이주민 유입 제한과도 연결되는데, 이주민 유입 제한 여론은 9년 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찬성론이 승리하게 된 대표적 요인 중 하나였다. 이밖에 영국은 육가공품을 수출할 때 유럽연합의 검역을 기존보다 덜 받기로 하는 대신, 유럽연합의 식품안전 및 동물 복지 규정을 ‘영구히’(permanently) 준수하기로 하는 등 일정 부분을 양보했다.
영국이 조급해진 이유는 경제 문제 때문이다.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로 브렉시트를 결정했지만 실제 브렉시트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적용됐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정이 발효된 날짜는 투표 후 3년 반이 지난 2020년 1월31일이었고, 이날을 공식적 브렉시트의 시작으로 본다. 하지만 이때부터 영국과 유럽연합은 1년간의 이행 기간을 거쳐 그해 12월31일에야 이행 기간이 끝났다. 영국과 유럽연합은 ‘무역 및 협력 협정’(TCA)이라는 무역협정을 맺어 2021년부터 적용했는데, 이때부터를 실질적 브렉시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영국과 유럽연합이 브렉시트 이후에도 관계를 신중하게 조정했음에도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영국 재무부 산하 예산책임국(OBR)은 브렉시트를 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는 시나리오를 통해 브렉시트의 영향을 추적하고 있다. 지난 2월 예산책임국은 영국이 브렉시트를 하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경우와 현재를 비교해, 브렉시트 이후 수출입 규모가 15% 감소했다고 진단했다.
더구나 브렉시트가 공식 시작된 해인 2020년 3월에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영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이 경제적 타격을 크게 입었다.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완화하기 위해 각국은 돈을 풀었고, 이로 인해 팬데믹이 사그라들 즈음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나라 중 하나로 2022년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11.1%로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불확실성이 커진 영국 경제에 투자하는 투자자는 점점 줄었고, 대기업보다 소규모 자영업자 중심으로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19일 ‘관계 재설정’ 합의 뒤 “영국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유럽연합과 관계를 재설정하려 한다”며 “영국의 유럽연합 공식 탈퇴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해결해야 할 경제적 과제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2021년), 뉴질랜드(2022년), 인도(2025년)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유럽연합 탈퇴로 생기는 불이익을 줄이려 했다. 지난해 영국은 아시아·태평양 국가가 아닌 나라로서는 처음으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도 가입해 수출시장을 확대하려 했다. 하지만 이 노력이 브렉시트로 생긴 부정적 영향을 모두 상쇄할 정도는 아니었다.
쇠락하는 경제 상황 탓에 영국의 여론은 점점 변하고 있다. 2016년 6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한 이들은 51.9%, 잔류를 지지한 이들은 48.1%로 탈퇴 여론이 다소 우세했다. 하지만 9년 뒤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의 이달 조사 결과를 보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은 잘한 결정인가?’란 질문에, ‘잘한 결정’이란 응답은 31%에 그쳤다. ‘잘못된 결정’이란 응답은 56%로 크게 증가했다. 영국에선 유럽연합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탈브렉시트’ 시위가 꾸준히 일어났다. 지난달 19일 영국이 유럽연합과 관계 재설정 합의를 체결한 장소인 런던 랭커스터 하우스 앞에선 브렉시트 반대자들이 파란색 유럽연합 깃발을 들고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수당이 지난해 14년 만에 정권을 놓친 점도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는 계기가 됐다. 브렉시트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집권했던 시기에 국민투표로 시작해, 테리사 메이와 보리스 존슨 총리 등 보수당 정권에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지난해 정권교체를 이뤄낸 노동당 대표 스타머 총리는 “유럽연합과 관계를 이전과 달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연합과 새 합의를 체결한 영국을 두고 지난달 20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영국이 거물급 강대국들 사이에 낀 중견 규모의 경제국이 됐다”는 진단까지 내놓았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거대 경제 블록에 끼지 못하게 되면서 힘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국가 단위로 보자면 2023년 세계은행 통계 기준 영국의 국내총생산은 3조3808억5500만달러(약 4676조3986억3600만원)로, 인도(5위)를 잇는 세계 6위 경제 대국이다. 다만 세계는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이란 3대 무역 블록을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영국은 이들 블록만큼 영향력을 갖기 힘들다는 의미다.
9년 전 국민투표 때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영국이 유럽연합의 관료주의와 규제에서 벗어나 더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난달 19일 영국이 유럽연합과 맺은 합의를 보면 과거보다 입지가 약해진 영국이 여러 분야에서 양보를 요구받았다. 조너선 포티스 킹스칼리지런던 교수(경제학)는 이 신문에 “영국은 훨씬 더 제한된 선택지만 고를 수 있다”며 “우리는 이제 훨씬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으며 영국은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영국인들은 앞으로 영국이 유럽연합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길 바랄까. 이달 유고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이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에 재가입하진 않되, 유럽연합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안을 가장 선호했다.
이 방안에 대한 찬반을 묻자 전체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65%가 찬성했고, ‘모른다’ 19%, ‘반대’가 16%였다. 앞으로 영국이 유럽연합에 재가입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 조사에서 ‘영국의 유럽연합 재가입을 지지하느냐’는 물음에는 ‘찬성’이 56%, ‘모른다’ 10%, ‘반대’가 34%였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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