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사각지대'에 놓여 힘겹게 육아와 연구를 병행해야 하는 청년과학자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 문애리 WISET 이사장, 정진택 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정남호 KAIST 기혼자 자치회 회장(전기 및 전자공학부 박사과정생)이 20일 서울 WISET 사무실에서 모였다. WISET 제공
<편집자 주>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은 과학자로 발돋움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평생 가져갈 연구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출산과 육아를 하는 과학자에게는 가장 가혹한 시기입니다. 밤낮없이 육아와 연구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학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법적 육아지원에서 배제된다는 점입니다. 법적인 휴직 기간, 보육시설 이용 가산점뿐 아니라 육아휴직비를 지원받지 못합니다. 생계의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연구를 포기하는 경우가 현장에서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육아하는 아빠 과학자'를 연재한 동아사이언스는 올해에도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함께 연구현장에서 연구와 육아를 함께하는 청년 과학자들을 만났습니다.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이 겪는 현실 육아, 필요한 육아지원 제도, 연구의 어려움 등을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생생히 들여다 봅니다.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육아'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연구 경쟁은 굉장히 치열하기 때문에 연구실에서 청년과학자의 육아를 무작정 배려하기는 쉽지 않아요. 정부가 대학과 연구기관을 적극 지원해 연구실이 먼저 육아를 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문애리 WISET 이사장)
'제도 사각지대'에 놓여 힘겹게 육아와 연구를 병행해야 하는 청년과학자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 전문가 3인이 모였다. 문애리 WISET 이사장, 정진택 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정남호 KAIST 기혼자 자치회 회장(전기 및 전자공학부 박사과정생)이 20일 서울 WISET 사무실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육아기 청년과학자의 주요 애로사항을 진단하고 지원방안을 모색했다.
정남호 회장은 육아기 청년과학자가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동료를 주변에서 찾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고립감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기혼자 자치회 회장이다 보니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학생들이 상담을 요청한다"며 "하지만 육아 지원은 연구실이나 교수 재량에 달려 있어 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육아하는 청년 과학자는 KAIST 대학원생 약 7000명 중 1% 정도다. 비율은 적지만 인원수는 약 70명으로 적지 않은 셈이다.
문 이사장은 연구실이 쉽게 청년과학자에게 육아 지원을 해주기 어려운 구조라는 점을 짚었다. 그는 "대학에서 교수는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매진해야 하는 구조"라며 "성과를 내기 위해 달려야 할 시기에 연구실 연구원이 육아를 위해 연구를 멈추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문 이사장은 청년과학자 육아는 연구실에서 반드시 배려해줄 부분이라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저출산 시대에 '인재'가 국가 경쟁력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과학자가 되기 위해 훈련하고 학생이 계속 연구를 이어가야 국가 인재가 된다"며 "육아로 인해 여성 연구자들이 하던 연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인재를 양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지원 사례가 출산이나 육아로 휴학하는 석박사 과정 학생에게 1년간 박사과정생과 석사과정생에게 각각 월 45만원, 26만5000원을 제공하는 KAIST 사례다.
정남호 KAIST 기혼자 자치회 회장(전기 및 전자공학부 박사과정생). WISET 제공
해외 사례도 다양하다. 아일랜드 과학재단(SFI)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에게 최대 26주간 출산휴가를 제공하며 이 기간 동안 월 최대 210만원을 지원한다. 캐나다 자연과학·공학 연구위원회(NSERC)는 학생 연구원이나 박사후연구원을 위한 유급 출산휴가와 육아휴가를 지원한다. 영국에서도 박사후연구원에게 가족돌봄·출산·육아를 위해 육아휴가를 제공하는 '뉴턴 국제 펠로우십'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다만 정진택 교수는 해외 사례처럼 국내 대학에서 이같은 제도를 똑같이 운영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사립대학에서 예산도 많지 않은 데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아 청년과학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해 예산을 써야한다는 인식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대학에서 KAIST 기혼자 자치회처럼 육아 지원이 필요한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출해야 한다"며 "청년과학자 육아를 지원하는 사례를 만들어 주변에 널리 알려 확산시켜야 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저출산 현상이 심각한데 육아를 하는 연구자를 배려하고 포용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청년과학자 육아 지원 사례를 적극적으로 홍보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문 이사장은 "대학에서 신임 교원을 교육시키는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청년과학자 육아 배려 문제를 알리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정 회장도 문 이사장의 의견에 동의하며 "지도교수의 인식 전환이 육아기 청년과학자에 대한 연구실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실 후배가 연구와 육아를 병행하며 박사 학위를 성공적으로 땄습니다. 지도교수님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교수님이 회의를 할 때마다 '육아를 하는 연구원은 사회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뱃속 아기에게 무리되지 않도록 다른 연구원들이 많은 배려를 해달라'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정 회장)
문애리 WISET 이사장. WISET 제공
문 이사장은 특히 임신한 청년과학자가 임신 초기부터 연구실에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연구를 하다보면 임신 초기 연구자에게 유해한 물질을 다루는 연구환경에 직면한다"며 "연구자가 쉽게 임신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연구실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청년과학자 육아 지원 제도로 구체적으로 정 회장은 육아기 청년 과학자들을 위해 긴급 돌봄 제도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문 이사장은 "실험을 하면 변수가 발생하고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제때 어린이집 자녀 하원 시간을 못 지키는 등 예측할 수 없는 육아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WISET은 올해 4대 과기원 소속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대학원생 및 박사후 연구원을 대상으로 갑작스러운 돌봄이 필요한 상황을 돕기 위해 '2025년 과학기술인 긴급돌봄 바우처 지원사업'을 시범 운영 중이다. 총 180만원 상당의 돌봄 바우처를 제공한다. WISET에 따르면 신청 접수를 받자마자 1시간 내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 같은 사업이 청년과학자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는 '휴가'가 아닌 '연구'가 이들을 위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청년과학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성과를 낸 뒤 졸업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아로 인해 무조건 휴가를 권장하는 것이 답이 아니다"며 "유연근무제나 긴급돌봄을 통해서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진택 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WISET 제공
정 교수는 육아기 청년과학자를 배려하는 문제에 대해 역차별이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지만 다양성과 포용성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제인구가 늘어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대학을 가는 여성 비율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활동 인구에서 남성보다 여성 비율이 적어요. 어렵더라도 여성 연구자를 육아 지원 측면에서 더욱 배려하려고 해야 이들이 경제인구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육아기 청년과학자를 적극 지원해야 하는 이유지요."
20일 간담회 참석자들. WISET 제공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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