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심층취재 추적+
정책 연구ㆍ평가 위한 노동패널조사
학계와 공기관 연구 자료로도 활용
올해는 예산 줄어 학술대회도 중단
조사 부실화는 정책 수립에 악영향
결국 ‘정부 실패’ 부메랑으로 귀결
문제를 파악해 개선책을 만들려 할 때 가장 필요한 건 통계다. 노인빈곤율을 토대로 노인복지정책을, 출산율을 토대로 인구정책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통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은 국책연구기관 한국노동연구원이다. 특히 이들이 진행하는 한국노동패널조사는 한국 노동정책 수립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예산을 크게 줄이는 바람에 노동패널조사의 기초가 무너지게 생겼다.
한국노동패널조사는 정부의 정책을 수립하고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준다.[사진|뉴시스]
# 지난해 2월 2일 열린 '2023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서 부모의 소득ㆍ학력이 높을수록 자녀의 임금 수준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소개됐다. 이른바 계급의 세습 현상이다.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를 토대로 특정 시기 출생자들의 임금과 그 아버지의 가구소득을 비교해보니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지난 6월 1일 한국은행은 저출산ㆍ고령화가 국내 소비경제에 구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는 60세 이상 가구의 소비 수준이 50대 가구보다 9%가량 낮다는 내용도 담겼다. 역시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였다.
이처럼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가 학계나 공공기관 등 다양한 이들의 연구 기초자료로 활용되는 건 그만큼 공신력이 있어서다. 이 조사는 우리나라 고용ㆍ노동정책을 연구하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이 매년 1만20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1998년 5000가구 조사로 시작) 패널조사다.
패널조사란 일정 기간마다 동일한 대상자에게 동일한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진 후 그 결과를 토대로 의견의 변화를 살펴보는 면접 여론조사다.[※참고: 한국노동패널조사의 대상은 전국 15세 이상 가구원이다. 조사 내용은 경제활동 상태, 일자리 특성, 근로시간, 임금, 고용 형태, 만족도, 소득, 소비, 자산, 부채, 사교육, 주거 등이다. 설문은 약 1200문항으로 구성된다.]
장기간 특정 대상들의 변화를 분석하기 때문에 일정 시점을 기준으로 단면만을 보여주는 통계조사와는 달리, 깊이 있는 정책연구와 정책평가를 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의 노동시장 진입과 이동과정, 실업자들의 재취업과정과 장기실업, 실업급여의 재취업효과, 개인의 의식구조와 노사관계의 변화, 육아장려금과 주부의 경제활동 변화 등과 같은 연구들은 한국노동패널조사로만 가능하다. 당연히 더 많은 대상을, 더 오랜 기간 조사하면 통계의 질은 향상된다.
이 때문에 고용노동부가 이 조사의 예산을 지원(세부사업명은 '노동시장연구센터 위탁연구')하고 있으며, 이 조사 자료를 토대로 도출된 연구결과물은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한국노동패널조사 예산을 삭감했다. 정부의 과학적 정책 수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사진|뉴시스]
문제는 한국노동패널조사를 위한 예산이 점점 줄고 있다는 점이다. 2022년 21억1800만원이던 예산은 2023ㆍ2024년 20억1200만원으로 5.0% 줄었고, 올해는 17억6500만원으로 12.3% 더 감소했다.
[※참고: 미국엔 1968년부터 시작한 가구패널조사(PSIDㆍPanel Study of Income Dynamics)가 있다. 이 조사의 대상 가구는 9000가구, 2만5000명의 개인이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간 이 조사에 최소 1200만 달러에서 최대 2000만 달러(당시 기준 약 130억~220억원)의 예산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비하면 한국노동패널조사는 훨씬 적은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마저도 삭감된 거다.]
■ 문제점① 패널조사 부실화 = 예산 삭감이 불러올 부작용은 결코 작지 않다. 우선 예산의 삭감은 곧바로 한국노동패널조사의 질적 하락을 부추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언급한 것처럼 이 조사의 설문 문항은 1200개에 달한다.
그래서 조사원은 대상자를 방문해 면접조사를 실시한다. 예산의 대부분이 이 면접조사를 위한 '조사비'다. 조사비는 2024년 17억8500만원에서 올해 16억6900만원으로 1억1600만원(6.5%) 삭감됐다.
한국노동연구원 관계자는 "올해 조사비 감액으로 약 800가구(6.7%)가 조사에서 제외될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조사를 실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털어놨다.
물론 800가구라고 하면 제외되는 조사 대상 가구가 적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대상(개인ㆍ가구)을 장기간 추적하는 한국노동패널조사의 특성을 감안하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 축적한 자료의 일부를 잃는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여서다.
특히 한국노동패널조사는 지난 27년간 자료를 축적한 덕분에 해당 자료를 활용해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를 연결한 세대 연구가 가능했는데, 그 역시 일부 제약을 받게 됐다. 한번 제외된 패널을 다시 구축하기도 쉽지 않아서 일부 가구가 제외되는 것 자체만으로 자료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 문제점② 2차 연구 활용 제약 =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를 활용한 2차 연구도 줄어들 수 있다.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를 활용한 학술대회 개최나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하기 위한 워킹페이퍼(조사 자료를 활용한 다방면의 연구보고서) 발간 등을 위한 예산 7500만원은 전액 삭감됐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 활용 빈도는 연간 200건가량이고, 학술과 정책자료에도 3000건 이상이 활용되고 있다. 정책자료집 257건, 학술지 1676건, 학술대회와 토론회 704건, 학위논문 476건, 기타 191건 등이다.
정책 평가가 부실하면 올바른 정책이 나오기 힘들다.[사진|뉴시스]
■ 문제점③ 정부 실패 부메랑 =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가 부실해지고, 그 자료를 활용한 2차 연구도 줄면 결국 정부 정책평가도 부실해질 가능성이 높다. 정책평가가 부실하면 과학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한국노동패널조사의 자료를 활용해 정책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인데, 결국 예산 삭감이 '정부 실패'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거라는 얘기다. 한국노동패널조사 예산을 함부로 줄여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계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정책 대안 제시를 위해 세밀한 통계 데이터 구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노동패널조사의 예산 삭감을 한번 더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김용원 나라살림연구소 책임연구원
thick99@gmail.com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