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퇴직연금 431조7000억원
수익률 높일 기금형 주목해온 정부
하반기 법안 예고했지만 지연 우려
도입 논의 10년 넘었지만 잇단 좌초
과거 정부도 탄핵 이슈로 제동 걸려
어렵게 올린 법안은 자동 폐기 수순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10년이 넘게 이뤄지고 있지만 종착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금형 도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때마다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 등에 따른 정국 혼란으로 동력을 잃은 탓이다.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이 400조원을 처음으로 돌파하며 빠르게 몸집을 키우는 만큼 기금형 도입을 더는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연초 활발했던 기금형 논의…새 정부 들어 '잠잠'
지난 4일 새 정부가 출범한 가운데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방향성을 두고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이 431조7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지만 낮은 수익률로 한계가 뚜렷한 상황에서 대안으로 기금형이 떠오르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퇴직연금 수익률은 최근 5년, 10년 연환산 기준 각각 2.86%, 2.31%로 낮았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사외에 별도의 독립 기금을 조성하고 노사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금운용위원회가 운용 방향을 정하도록 한 제도다. 이때 집행은 수탁 법인이 한다. 기업이나 근로자가 퇴직연금 사업자(금융사)와 계약을 맺고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DB), 확정기여(DC)형 등 계약형과 다른 방식이다. 전문성을 높인 투자와 함께 규모의 경제로 수익률을 높이는 데 이점이 있다.
정부는 지난해 '퇴직연금 제도개선 전담반(TF)'을 꾸리고 논의 과정에서 기금형 도입 가능성을 살폈다. 올해 1월 발표한 '2025년 경제정책방향'에는 기금형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지난 2월에는 김문수 당시 고용부 장관이 기금형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해 논의에 진척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고용부는 하반기 법안 발의를 위해 지난 3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추진단'을 꾸렸다.
하지만 지난 4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판결이 이뤄진 뒤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정국 혼란으로 논의에 제동이 걸렸다. 퇴직연금 제도개선 TF는 상반기 중에 제도 개선안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결과물은 없었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추진단은 논의를 끝내지 못해 이달까지였던 운영 기간을 연장했다. 하반기 법안 마련도 그에 따라 미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현 정부의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구상도 아직 뚜렷하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30인 미만 사업장이 대상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지만 전반적인 기금형 도입 내용은 포함하지 않았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계약형에서 기금형으로 선택지를 넓히는 차원으로 접근하면 유연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현재 협의가 이뤄진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과거도 같은 흐름…국회 계류로 폐기된 도입 법안
현 상황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처음 나온 2014년 이후 시점과 닮았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발표한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에 2016년 7월부터 대기업을 시작으로 단계별로 기금형 제도를 도입해 계약형과 병행하겠다는 계획을 포함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2016년 9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며 기금형 도입을 위한 법적 토대를 쌓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 본격화한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에 정국 혼란이 이어지자 입법 추진에 힘이 빠졌다. 이후 탄핵 판결과 함께 이뤄진 정권 교체로 2017년 5월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 과제에 기금형 제도 도입을 포함하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규제개혁위원회는 수탁 법인을 비영리 재단으로 한정한 법안 규제가 제도 확산을 막을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는 법인형 수탁자 규제를 완화하는 식으로 법안을 일부 수정했고, 1년이 지난 2018년 4월에서야 국무회의에서 해당 법안을 의결했다. 당시 법제처 심사를 마쳤음에도 국무회의 의결 전 정부가 법안을 철회했다는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법안은 국회를 향했다. 하지만 회부된 법안은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20대 국회 회기 종료로 2020년에 자동 폐기됐다. 6년여 인고에도 좌초된 것이다.
김재현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부 교수(전 한국연금학회장)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으로 계약형 사업 기반의 약화를 우려한 퇴직연금 사업자(금융사)들이 고비용 구조 등을 내세워 기금형 제도 도입을 반대했다"며 "법안에서 수탁 법인을 비영리만 허용한 것이 (법안 반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다만 2021년 3월에 정부안이 아닌 국회 주도로 마련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2022년부터 푸른씨앗을 운영할 법적 제도가 마련됐다.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푸른씨앗은 도입 뒤 빠르게 성장해 지난해 적립금 규모가 1조원을 넘겼다. 연간 수익률은 6.52%를 기록해 일반 퇴직연금보다 훨씬 높았다. 기금형을 도입하는 데 있어 본보기를 제공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10년 넘게 이어진 도입 논의를 이제는 마무리해야 한다고 봤다. 퇴직연금이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더 늦춰서는 안 된다는 평가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운용하는) 푸른씨앗처럼 공공기관이 운용하는 퇴직연금기금이 필요할 수 있다"며 "정부 재정 지원이 수반되는 공공형 시장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세종=김평화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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