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중소·중견기업 대표 4인 인터뷰
산업 생태계 없어 모두 각자도생
아이디어 있어도 산업화 길 막혀
반도체 산업 골든타임 길어야 5년
한국 반도체 산업을 대표하는 중소·중견기업들이 매경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이들은 힘겹게 개발한 신제품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산업화로 이어질 수 있게 길을 터 달라고 호소했다. 박진석 오로스테크놀로지 전무, 하정환 SK트리켐 대표, 신재호 디엔에프 대표, 이민형 큐로켐 대표(왼쪽부터)가 화이팅을 위해 손을 모으고 있다. <이승환 기자>
길어야 5년, 대한민국 반도체 중소·중견기업 대표들이 말하는 골든타임이다. 최근 일각에서 제기하는 ‘K반도체 위기’의 타개책을 찾기 위해 매일경제신문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개발하는 중소기업 대표 4인을 만났다.
이들은 “반도체 산업이 위기를 넘으려면 중소기업들이 성장해 완성된 생태계를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평가받을 기회조차 없어 산업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설계부터 마지막 패키징 단계까지 길고 복잡한 과정이다. 양산 설비도 매우 비싸기 때문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제조사들은 검증된 소재·부품·장비만을 사용한다. 문제는 국내 중소기업들이 열심히 연구개발(R&D)해 소재·부품·장비를 만들어도, 제대로 된 평가나 검증받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반도체의 핵심 소재를 생산하는 디엔에프의 신재호 대표는 “제품을 생산해도 성능 평가를 받아야 최종 납품할 수 있는데, 국내에는 이를 위한 인프라스트럭처가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다”고 했다. 새로운 소재·부품·장비를 평가하려면 결국 실제 양산 공정에 적용해봐야만 성능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개별 중소기업이 수백억~수천억 원을 들여 공정을 직접 갖추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24시간 돌아가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에 중소기업 제품을 검증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어도, 검증받을 방법이 없어 산업화 기회가 막힌 상황이다.
현재 한국 중소·중견기업들이 시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시설은 나노종합기술원 한 곳뿐이다. 신 대표는 “정 필요하면 외국에 직접 비용을 지불하고 성능을 검증하기도 하지만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했다.
대표들은 입을 모아 공공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공팹이란 중소기업들이 만든 시제품을 직접 양산하면서 테스트해 보고 검증받거나 보완점을 찾을 수 있는 시설이다. 평가에 필요한 일부 장비들을 공용으로 구축해놓으면 중소기업들도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고, 결국 한국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전반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업계는 주장한다.
하정환 SK트리켐 대표는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은 R&D에서 산업화까지의 과정이 험난하고, 중소·중견기업에는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며 “소량의 시제품을 빠르게 제작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소부장 기업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공공팹 부족은 단면일 뿐, 더 본질적인 문제는 빈약한 생태계다. 박진석 오로스테크놀로지 전무는 “지금까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연구기관과 대학이 모두 따로 노는 구조였다. 이들이 협력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있어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반도체로 부흥한 대만의 경우 TSMC를 중심으로 주변에 칭화대·교통대 등 대학과 연구기관, 중소기업들이 반경 몇 ㎞ 안에 모여 있다. 인재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아이디어를 토론하고, 바로 실제 생산까지 연계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한국은 제대로 된 클러스터랄 게 없다. 박 전무는 “대기업, 대학, 연구소들이 전부 떨어져 있고 중소기업들은 협업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고 했다.
이민형 큐로켐 대표는 “한국은 지금까지 대체로 대학이나 연구소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졌다”며 “정책 기획 단계부터 기업이 참여하고 기업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공공팹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어떤 설비를 구비할지는 기업마다 원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공공팹의 구체적인 역할이나 범위도 논의해야 한다.
이 대표는 “정부가 기술 로드맵을 갖고 어떤 기술에 주력할지 결정해야 하고 수요 기업도 명확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기업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뜬구름 잡는 소리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심각했다. 하 대표는 “새로운 기술 표준이 정립되면 후발 주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사라진다”며 “지금 같은 과도기에 우리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회는 영영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신 대표 역시 “메모리 산업 주도권이 과거 미국에서 일본, 한국으로 넘어온 것처럼 지금의 주도권은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며 “정말로 우리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할 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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