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 의혹을 받고 있는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의 1심 재판이 일시 정지됐다. 이 전 부지사 측이 “재판부를 바꿔달라”며 기피 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이 전 부지사 변호인들은 “재판부가 검찰의 유도신문을 제지하지 않는 등 불공정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다”고 신청 이유를 설명했다. 그 시점까지 이미 1년 넘게 끌어 온 재판인 만큼 검찰은 울분을 토로했다. 1심 선고를 고의로 지연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선고를 피하려고 기피 신청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며 “일종의 ‘재판부 쇼핑’”이라고 맹비난했다.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씨. 해외 도피 11개월 만인 2023년 3월 몬테네그로에서 붙잡혀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고 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나란히 그의 송환을 요구하며 경합 중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꼭 재판을 받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혹시 무슨 일이 생겨 송사에 휘말리는 경우 자기 마음대로 재판부를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 대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할 때 학점을 잘 주는 교수를 ‘에이(A)폭격기’라고 부르며 너도나도 그 수업을 들으려고 애쓰던 기억이 난다. 형사재판의 경우 형량이 관대하다고 소문난 판사는 피고인들이 줄을 서는 반면 실형 선고율이 높다고 알려진 법관은 재판 기회조차 얻기 힘들지 모른다. 이런 재판부 쇼핑을 막고자 법원은 사건 배당의 원칙과 기준을 마련해 소송 당사자들이 담당 판사를 선택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행여 재판부 기피 신청을 내더라도 받아들여질 확률은 지극히 낮다.
가상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 권도형씨는 해외 도피 중 몬테네그로에서 붙잡혔다. 앞서 권씨를 상대로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한 미국과 한국 정부가 서로 “우리가 처벌하겠다”며 경합하고 나섰다. 이런 묘한 상황이 되레 권씨에겐 재판부 쇼핑의 기회가 됐다. 권씨 같은 경제사범에 대해 미국은 법률상 100년 이상의 징역형 선고가 가능하다. 사실상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반면 한국은 현행법으로 아무리 엄중히 처벌해도 징역 40년 정도가 최대 형량이라고 한다. 몬테네그로 법정에 선 권씨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밝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국내 언론은 ‘어쩌다 한국이 범죄자가 재판을 받고 싶어하는 나라가 되었느냐’는 취지로 보도하며 혀를 끌끌 찼다.
1심은 권씨 요구를 배척했다. 미국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권씨는 불복했다. 2심은 1심과 반대로 권씨의 한국행을 명령했다.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권씨는 한국에서 재판을 받을 처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몬테네그로 검찰은 끈질겼다. 대검찰청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인 대법원은 5일 원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권씨를 한국과 미국 중 어디로 보낼지는 법무부 장관이 결정할 몫”이란 단서를 달았다. 그간 안드레이 밀로비치 몬테네그로 법무장관이 ‘권씨의 미국행을 바란다’는 의중을 여러 차례 드러낸 만큼 미국 언론들은 “권씨의 미국 인도 가능성이 커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권씨의 재판부 쇼핑, 그 종착역은 어디가 될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주 일요일 밤 0시에 랭킹을 초기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