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필의 미래창
가난한 성장 환경이 도덕성 키운다 생각
그러나 현재 상황도 흙수저라면 덜 신뢰
시람들은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 출신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흙수저’ 출신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픽사베이
신용이 장사 밑천이란 말이 있다. 거래 상대방과의 신뢰가 사업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자산이란 뜻이다. 어디 장사만 그런가? 사회 공동체에서 건강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신뢰는 필수적 요소 가운데 하나다. 신뢰가 없으면 개인간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 생활도 힘들어지고 사회 분열은 심화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상대방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판단할까? 첫 인상이나 상대방의 특정한 행동이나 언사, 주변 사람들의 평판, 출신지역이나 학벌, 직업, 재산, 가족 상황 등등 사람들마다 저마다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사회 계층도 그 중 하나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연구진이 미국, 캐나다, 영국 성인 1900여명을 대상으로 신뢰 게임을 실험한 결과, 사람들은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 출신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흙수저’ 출신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미국심리학회가 발행하는 ‘성격 및 사회심리학 저널’(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도 사회경제적 계층이 낮은 흙수저라면 연민의 감정으로 더 도와줄 수는 있지만 신뢰는 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 시절의 빈곤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빈곤은 신뢰를 저버릴 만큼 절박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는 얘기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낯선 이의 어린 시절 또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그 사람의 신뢰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참가자들에게 서로 다른 배경의 신상 정보를 가상 인물 신상 정보를 제공했다.
가상의 인물들은 크게 어릴 때 공립학교에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비를 버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흙수저형과 사립학교에 다니고 유럽으로 휴가여행을 다녀오는 등 생활이 풍요로운 금수저형으로 나뉠 수 있었다.
연구진은 이어 참가자들에게 100달러짜리 상품권을 받을 수 있는 행운권 10장을 준 다음, 이를 가상인물 중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도록 했다. 또 전달된 행운권은 당첨금액이 3배로 불어날 수 있으며, 상대방은 불어난 행운권을 얼마든지 자신에게 돌려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흙수저에게 보내는 신뢰 행동은 신뢰가 아닌 이타심(연민)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픽사베이
신뢰도 측정은 두 가지로 진행됐다. 하나는 행동 신뢰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은 돌려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행운권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참가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준 행운권 수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정도를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기대 신뢰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만약 이 사람에게 10장을 모두 준다면, 이 사람은 30장을 갖게 되는데 그 중 몇장을 당신에게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실험 결과 사람들은 현재든 과거든 상관없이 저소득층 출신자에게 더 많은 행운권을 줌으로써 더 높은 신뢰 행동을 보여줬다. 그러나 행운권을 돌려받는 기대 신뢰는 어린 시절 흙수저에게서만 더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런 차이는 현재의 흙수저에게 보내는 신뢰 행동은 신뢰가 아닌 이타심(연민)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연구를 주도한 크리스틴 로린 교수(심리학)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어린 시절과 현재 상황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흙수저 출신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재도 흙수저인 경우에는 그 신뢰가 반드시 지켜질 것으로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층 계급 출신은 마음이 더 따뜻하고 도덕적인 반면, 부유층 출신은 차갑고 거만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픽사베이
흙수저 출신에게 더 높은 신뢰를 보내는 이유는 뭘까?
연구진은 도덕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층 계급 출신은 마음이 더 따뜻하고 도덕적인 반면, 부유층 출신은 차갑고 거만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의 또 다른 실험에서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가상 인물의 현재 사회경제적 상황을 암시하는 정보를 추가로 준 뒤 도덕성을 평가도록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흙수저 출신을 금수저 출신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현재의 사회적 계층은 도덕성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오히려 현재의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덜 도덕적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진은 “사람들은 도덕성이 어린 시절 환경에서 발달하여 평생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믿거나 부유함이 도덕성을 타락시킨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그러나 이에 대한 검증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는 사람들이 신뢰가 중요한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지 전략적인 고려가 필요함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예컨대 예나 지금이나 부유한 가정 환경이라면 과거는 감추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반면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형편이 어렵다면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선 개인의 어린 시절이나 현재 계층 배경이 실제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조사하지 않았다”며 “이는 향후 연구 과제”라고 밝혔다.
*논문 정보
Trust and trust funds: How others’ childhood and current social class context influence trust behavior and expectations.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https://doi.org/10.1037/pspi0000497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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