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cy 2.0]<6>흔들리는 과학정책 ②
[편집자주] 선거는 정책 경쟁의 장(場)이다. 미뤄왔던 정책 과제들이 쏟아진다. 정책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대한민국 '1.0'에서 '2.0'으로 가는 과정이다. 미뤄왔던 정책 과제를 이슈별로 살펴본다. 이 같은 정책 과제를 'Policy(정책) 2.0'으로 명명했다.
한국과 미국의 원자력 국가 R&D 투자/그래픽=김다나
"미국마저 연구에 진척이 없을 때 한국 연구자들은 어떻게든 해내 보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참 아쉽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23일 발표한 '원자력 산업 활성화를 위한 행정명령'엔 사용후핵연료 재활용 기술을 개발하라는 요구가 명시됐다. 원전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를 다시 전력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게 골자다. 사용후핵연료 처분 및 저장에 드는 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우라늄 공급망에서의 러시아 의존도를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사용후핵연료를 재활용하는 기술인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은 한국이 단연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쓰고 난 핵연료에서 재활용 가능한 연료와 폐기물(방사성 물질)을 분리해 회수하는 기술이다. 김용희 KAIST(카이스트) 국가미래전략기술 정책연구소장은 "긴 세월을 이어온 연구 성과가 이제 나타난다. 미국 연구진도 인정할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만 해도 원전 후진국으로서 젊은 연구자들을 미국에 보내 가까스로 기술을 배워왔다. 이후 아득바득 연구를 이어와 이젠 원전 선진국과의 상호호혜적 협력이 가능해졌다. 해야 할 때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원자력 R&D는 정책이 흔들릴 때 내상을 입은 대표적 분야다. 파이로프로세싱을 활용하는 차세대원자로 'SFR(소듐냉각고속로)' 개발이 탈원전 시기에 멈췄다. 김 소장은 "미국 아르곤연구소와 SFR 공동연구를 4~5년 진행하고 있었는데 거의 취소되다시피 하고 겨우 명맥만 남았다"고 했다. SFR 공동연구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주도로 올해 재개됐다. 하지만 짧지 않은 공백기 동안 동력을 크게 잃었다. 한 정부출연연구기관 관계자는 "이 시기 수많은 박사후연구원이 원자력 연구를 그만뒀다. 막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R&D도 유사한 격동을 겪었다. 신재생에너지 R&D는 탈원전 시기 반짝 힘을 얻었다가 친원전 정책과 함께 급락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에너지 R&D를 총괄했던 손정락 KAIST 녹색성장지속가능대학원 교수는 "어떤 기술에 '몰아주기'하느냐로 싸우는 건 무의미하다. 단점 없는 기술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비자(국민)에게 얼마나 깨끗하고 저렴하게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느냐는 관점에서 본다면 결론은 어렵지 않다.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 모두 균형 있게 잘 써야 한다는 거다. 균형이 R&D의 핵심"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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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거버넌스 변화, 정책 거부감만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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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책 부처 변화/그래픽=이지혜
한편 대선을 앞두고 과학기술 거버넌스 개편안도 나온다. 과학기술 부총리제 부활 등이 대표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과학기술 거버넌스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없이 이름과 형태를 바꿨다. 하지만 이는 연구 현장의 거부감만 증폭시킬 뿐이었다"고 했다. 과학기술부총리제는 참여 정부 때 처음 도입됐지만, 이명박 정부의 시작과 함께 사라졌다. 부총리가 사라지면서 과학기술부는 교육부로 흡수됐다. 과학기술부 자체가 폐지될 위기였지만 과학기술계의 격렬한 반대로 통폐합에 머물렀다. 2013년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며 다시 교육부와 분리돼 정보통신 분야를 이양받고 미래창조과학부가 됐다. 이후 2017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모든 일이 20년 안에 일어났다.
이 명예 교수는 "20년에 걸친 거버넌스 격동은 과학기술 정책이 관료의 목소리로만 가득 채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행정 체계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연구 현장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커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향후 과학기술 정책결정권자가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은 거버넌스 변화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R&D 삭감 사태로 깎인 과학기술인의 명예를 회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여정부 시절 과학기술부 장관 및 부총리 자문관이었던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는 "정치와 완전히 독립될 수 있는 분야는 없다"면서도 "다만 어떤 형태의 거버넌스든 과학기술 정책의 시작점엔 반드시 과학자의 판단과 전문성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건희 기자 wiss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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