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성의 이슈메이커]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
"정책공약집 발간이 가장 늦은 대선
TV토론이 역대 최악인 건 그 때문
주요 후보자들 공약 검증 과정을
유권자의 알권리 중심으로 고쳐야"
편집자주
한국의 당면한 핫이슈를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이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이번 대선 공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공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까지 겪은 대선 중 가장 엉망입니다. 이재명 후보 쪽은 정책이 너무 밀려 들어 조율이나 정리가 덜 된 느낌이라면, 김문수 후보나 이준석 후보는 준비 자체가 부족해 보입니다. 아무리 계엄과 탄핵이 있었다지만 수백조 원대의 나라 살림살이를 맡기는 게 대선인데 이렇게 치러도 되는지 걱정입니다."
지난 26일 대선 후보 걸개 사진이 여러 빌딩들을 휘감고 있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빌딩가.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선거를 인신 공격이 아니라 공약 싸움으로 만들어보고자 2006년 출범한 시민단체. 크고 작은 선거 때마다 후보 측에 공약 자료를 요청하고 검증,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6월 3일 치러지는 21대 대통령 선거는 그래서 문제다. 비상계엄 이후 요동친 각종 정치적 격변 때문인지 김문수 후보의 정책 공약집은 26일, 이재명 후보의 정책 공약집은 28일에야 발간됐다. 앞서 지난 21~25일 해외 체류자들의 재외투표는 끝났다. 세 차례에 걸친 TV토론도 27일 끝난 마당이다. 29~30일 사전투표일 직전에, 본투표일까지 1주일도 채 안 남은 시점에서야 겨우 나온 것이다. 그나마도 구체적 내용, 소요 예산 등 민감한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처리해뒀다. 그가 "공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나쁜 대선"이라 말하는 이유다.
사전투표 직전에야 정책 공약집 내놓은 건 문제
-이번 대선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부자 몸조심' 그리고 '단일화'밖에 없다고들 한다.
"그렇게 보인다. 역대 대선 중 공약집이 가장 늦게 나온 대선이다. 그마나 왜 이리 늦느냐는 지적이 이어지니까 내놓긴 했는데 TV토론 다 끝나고 선거일이 1주일도 채 안 남은 시점에서야 낸다는 건, 사실 뭐하려고 내는 건지 모를 일이다. 무책임하다."
-계엄, 탄핵 등으로 인한 조기대선이라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지 않나.
"그렇지 않다. 박근혜 탄핵으로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대선 11일 전, 홍준표 후보는 22일 전 공약집을 내놨다. 당시 홍 후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사정이었는데도 그렇게 했다. 계엄, 탄핵은 핑계일 뿐이다. 또 설사 그런 측면이 있다 해도 그건 정치인들 사정이다. 그걸 국민이 받아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21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빛의 혁명' 광화문 유세에서 박김영희씨로부터 '모두의 질문 Q 녹서'를 전달받고 있다. 고영권 기자
-지난 연말 이후 정치적 격변이 크다 보니 정책에 대한 관심도 옅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거다. 차기 정권은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다. 그러면 위원회 같은 조직이 들어서서 각 부처에 공약 과제들을 주고 이행을 독려하는 과정이 1년은 지속된다. 선거 전에 공약이 집중 조명을 받은 것도 아닌데, 선거 이후 인수위에서 한번 정리하는 과정도 생략되는 셈이다. 이전 사례를 보면 공약과 국정과제 연계율이 70%가 넘어 가는데 이렇게 해도 되나 싶다."
-그렇게 되면 어떤 위험이 생기나.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박근혜 정부 때 '문화융성'이다. 선거 때만 해도 공약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정책 정도였다. 그런데 집권 후 첫 국무회의 때 이게 주요 국정 과제로 떠올랐다. 다들 '어? 이게 뭐야' 했는데 나중에 가서야 그 뒤에 '최순실'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하나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다. 사전 논의 없이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라 나중에 정책 추진 과정에서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화융성이나 소득주도성장 그 자체가 틀렸다, 나쁘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미리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문화융성, 소득주도성장 같은 '갑툭튀' 정책 막아야
-'갑툭튀' 정책은 안 된다는 건가.
"정책은 내용은 물론, 정책 간 우선순위도 중요하다. 이게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도출된 정책인지, 어떤 논의를 거쳐 어떻게 정리됐는지를 보여주는 게 공약집이다. 공약집에서 벗어난 처음 들어보는 정책, 공약집 어디 한 귀퉁이에 있었는데 갑자기 크게 등장하는 정책이라면 그 뒤에 누가 있거나 하는 식으로 사고가 날 위험이 크다는 얘기다. 그런 정책은 잘 될 수도 없고, 추진 과정에서 엄청난 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공약집에 대해선 보통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다고들 한다.
"그렇지 않다. 물론 공약 그 자체만 보고 투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공약이 있을 경우엔 반응이 온다. 공약 때문에 표심을 바꾸는 사람이 1~2%만 돼도 선거판이 변할수 있다. 선거 막판 급히 튀어나오는 공약은 대개 그런 공약들이고 그래서 문제가 된다는 거다."
지난달 18일 서울 강서구 ASSA아트홀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21대 대통령후보자 1차 경선 비전대회에서 김문수 후보가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역시 공약집인 건가.
"그렇다. 좀 극단적이지만 이런 사례도 있다. 이명박 정부는 대선 때 성장률 7%,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를 묶어 '747'이란 구호를 내걸었다. 이게 어렵게 되자 나중에는 그건 공약이 아니었다, 미래지향적인 선거 슬로건이었다는 식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공약집 제일 앞에 747이 나온다'고 지적하니까 그제야 당시 대통령실에서 '그건 공약 맞다'라고 인정했다. 공약집 그거 누가 봐, 하지만 두고두고 꺼내볼 약속이다."
-일종의 족쇄다.
"정치가 팬덤으로 가선 안 된다. 선거는 아이돌을 응원하는 게 아니다. 선거는 유권자가 우리 대신 몇 년간 일할 사람을 고용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 뒤에도 이런 일을 하라고 계속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데 그게 공약이다. 제대로 된 공약집 하나 받아놓지 않고 그냥 권력을 준다? 그건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최소한 후보 선출과 동시에 공약집이 나와야
-공약집 발간 시기를 선거일 며칠 전, 이런 식으로 의무화하면 어떤가.
"발간 비용 등의 문제가 있어 후보자에게 강제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이 있다. 선거법 강행 규 정보다는 사회문화적 규범으로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후보 선출과 함께 공약집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선거 기간 동안 후보자와 공약을 두고 함께 얘기하면서 충분히 음미한 뒤 선택할 수 있다."
-그러려면 공약 준비가 상당히 빨리 이뤄져야 한다.
"해외 주요 정당들은 국민의 요구와 질문을 모아 정기적으로 책을 낸다. 그게 그린 페이퍼, 녹서다. 그리고 그런 국민의 목소리에 우리 당은 정책적으로 이렇게 대응하겠다는 답변서를 낸다. 그게 화이트 페이퍼, 백서다. 최근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가 바로 디지털 시대 노동 조건의 변화에 대해 묻고 답한 독일의 '노동 4.0 녹서', 그리고 '노동 4.0 백서'였다. 영국 같은 경우 집권당이 매년 한 차례씩 녹서와 백서를 낸다. 이렇게 누적된 녹서와 백서를 토대로 공약이 나와야 하고, 후보도 이걸 존중해야 한다."
28일 서울 강남역에서 이준석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는 당보다 후보와 캠프가 먼저인 듯한데.
"해외 주요 정당은 후보 경선 때 후보자와 정책공약을 동시에 선택한다. 당신이 아무리 후보자라 해도 공약은 이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고 선을 그어두는 것이다. 미국에선 이걸 '플랫폼'이라 부른다. 당내에서 논의된 내용을 후보자가 받드는 방식이다. 내가 후보니까 플랫폼을 벗어나겠다는 건 어렵다. 이번 대선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건 민주당이 처음으로 녹서를 냈다는 것이다."
-녹서 발간은 첫 시도인가.
"그렇다. 다른 걸 떠나 어쨌든 그런 작업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는 칭찬해줄 만한 일이다. 앞으로 이게 잘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구체적 공약으로 실제 연결돼서 정책화되는 지도 잘 지켜봐야 한다."
당의 정책 역량 강화를 위해 정당법 등 규제 풀어야
-국민의힘은 그런 과정이 없었나.
"후보 선출 과정에서 전국을 두어번 돌면서 '비전대회'라는 걸 연다. 이번엔 김문수-한덕수 후보 단일화 문제 때문에 빛이 바랬지만. 민주당의 녹서발간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이 여는 비전대회도 격려받아야 한다. 녹서나 비전대회 같은 게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지면 선거가 '저 사람 괜찮아 보여', '저 사람은 왠지 이상해'라는 식의 인상 비평으로 추락해버린다."
-우리나라 정당은 정책 역량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관련해서 정당 관련 규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린 '고비용 저효율'이란 이유로 중앙당과 시·도당 직원을 100명씩, 딱 200명으로 제한해뒀다. 그러다보니 실제 정책을 다루는 이들은 20~30명 수준에 그친다. 좋은 정책은 고사하고 국민 목소리를 듣는 과정 자체가 버겁다. 정책 관련 인력은 좀 탄력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또 국회의원 보좌관 풀제도 고민해볼 수 있다. 미국은 각 전문 분야별 보좌관 풀단을 구성해 개별 의원의 입법 활동을 지원한다. 개별 의원이 개별 보좌관을 두는 방식으론 전문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야 당에 정책적 역량이 쌓인다. 정치나 정치인을 더럽다고 멀리만 할 게 아니라 국민 의견을 모아 정책을 만들어내는 부분만큼은 적극 지원하고 응원해줄 필요가 있다."
지난 26일 민주노동당 공식 유튜브에서 권영국 후보가 반려견 '말이'와 함께 동물권 공약을 내놓고 있다. 민주노동당 유튜브 캡처
-공약이 약하다 보니 세 차례 걸친 TV토론이 '저질 말싸움'에 그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청률도 아주 저조했다 한다.
"아쉬운 부분인데, 그 부분도 좀 바꿨으면 한다. TV토론을 가장 유력한 후보를 집중 조명하는 방식으로. 지지율이 일정 정도 이상 되는, 혹은 집권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두 후보만 집중 조명하는 거다. 해외에선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후보가 난립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낮은 후보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 같은 사람이 들으면 서운해할 이야기다.
"물론 국가기관의 공식 토론은 기회의 형평성을 감안해도, 그 이외 영역에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들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거다. 또 후보만 나서는 게 아니라 참모진도 함께 팀을 꾸려서 토론에 나서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만하다. 집권하면 함께 일할 사람들의 면면을 미리 선보이는 차원도 있다. 주제에 따라 전문 진행자나 패널이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정책과 공약에 대한 깊은 얘기가 가능하다. 지금처럼 후보자 개개인이 나서서 당신들끼리 알아서 논쟁하라는 식으로 놔두면 상대 비방밖에 안 나온다."
TV토론 방식도 '유권자의 알권리' 중심으로 재편해야
-공약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는 기존 틀을 깰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선거를 '관리'한다는 개념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후보 간 형평성을 너무 중시한다. '누구 대 누구' 구도에다 '후보별 시간 배분' 방식을 고집한다. 이제는 후보 간 형평성을 넘어 유권자의 알권리 쪽으로 강조점이 넘어갔으면 좋겠다. 외국의 경우 공약을 먼저 내는 사람을 집중 조명하고, 토론회에 한쪽이 불참하면 다른 후보만으로 진행해버린다. 우린 상대방이 관련 공약을 낼 때까지 기다려서 비교하거나 토론회를 무산시키지만, 그들은 먼저 공약을 내놓는 후보가 더 준비되어 있다고 보고 불참하는 후보는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말씀하신 대로 형평성 차원에서 논란이 될 수 있겠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 특히 진보정당에 대한 배려 때문에 우리 선거전이 지금처럼 흘러온 셈인데 결국 좀 더 깊은 정책 경쟁을 유도하는 데는 실패한 게 아닌가, 라는 고민이 있다. 이건 앞으로도 계속 논의해봐야 할 주제다."
지난 2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치러진 대선후보 3차 토론회에서 후보자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명, 권영국, 김문수, 이준석 후보. 뉴시스
-마지막으로 이번 대선, 두 후보 공약의 경향을 꼽는다면.
"전반적으로 '우클릭'이 눈에 띈다. 이재명 후보는 이전의 경제민주화보다 '공정경제'라는 표현을 쓴다. 부의 재분배 문제에서도 예전 민주당 정책과 관련된 부분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은 예전부터 친재벌 이미지 때문에 '기업' 대신 '시장'을 내세웠다. 그런데 김문수 후보는 기업이란 단어를 대놓고 쓴다. 공정경제나 친기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불평등, 양극화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건 우려되는 지점이다."
2006년 2월 1일. 매니페스토실천운동본부의 출범일이다. 2월 1일은 둘(2)이 하나(1) 되는 날을 골랐기 때문이다. "보수니 진보니 싸우더라도 그 둘이 정책 경쟁으로 하나 되자는 뜻을 담았다"는 이 사무총장은 "부부의 날(5월 21일) 같은 거 잘 모른 채 그렇게 정했다"며 웃었다.
이후 20년간 '선거와 공약' 한 우물만 파왔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정치란, 선거란, 공약이란 결국 주고받는 타협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한 독일대사가 해준 말을 전했다. "독일에선 '합의된 상황이 내 마음에 쏙 들면 그건 폭력'이라고 가르친답니다. 합의라는 건 서로 일정 정도 양보했다는 뜻인데 나만 양보 안 했다는 건 다른 누구에겐 폭력이었을 것이란 뜻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좋은 합의란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가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든 조금은 불편한 합의라는 거죠." 선거 공약은 그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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