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 김경문 감독(왼쪽), LG 트윈스 염경엽 감독

6월 16일 현재 KBO리그 순위표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나이 50대 후반 이상의 이른바 '노장' 감독이 이끄는 팀이 1위부터 4위까지 순위표 최상단을 점령하고 있는 점이다. 

현역 가운데 유일한 60대 사령탑이자 900승 감독인 1위 한화 이글스 김경문(67) 감독을 필두로 2023 통합 우승 사령탑인 2위 LG 트윈스 염경엽(57) 감독, 3회 우승과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빛나는 3위 롯데 자이언츠 김태형(58) 감독, 2021 통합 우승 감독인 4위 KT 위즈 이강철(59) 감독까지. 풍부한 연륜과 강한 카리스마로 무장한 원로 지휘관들이 '4강'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5위부터 10위까지는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 사이의, 나이가 젊거나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팀이란 공통점이 있다. 5위 삼성 박진만(49) 감독은 정식 부임한 지 올해로 3년째다. 6위 SSG 이숭용(54) 감독은 나이는 적지 않지만 지휘봉을 잡은 건 작년이 처음이다. 7위 KIA 이범호(44) 감독은 10개 구단 유일의 1980년대생 감독이고, 8위 NC 이호준(49) 감독은 올해가 처음인 초보 감독이다. 

9위 두산은 이승엽 감독이 물러나고 조성환(49) 감독대행이 임시로 핸들을 잡았다. 10위 키움 홍원기(52) 감독은 논외. 물론 1위부터 7위까지 간격이 6.5경기 차에 불과해 언제 순위가 뒤집힐지 모르지만, 대체로 경험 많은 지도자들이 이끄는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롯데 자이언츠 김태형 감독(왼쪽), KT 위즈 이강철 감독 photo 뉴시스

프로야구 '노장들의 역습'

'노장들의 역습'이라고 할 만한 현재 상황은 불과 1~2년 전 분위기와는 정반대다. 한동안 KBO리그 감독석엔 노인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구단들은 나이 많은 감독을 꺼리고 젊은 감독과 외국인 감독을 선호했다. 새 감독을 찾는 구단들은 경험 많은 사령탑이 시장에 FA로 나와 있어도 좀처럼 손을 내밀지 않았다.

김태형 감독만 해도 2022시즌을 끝으로 두산을 떠난 뒤 몇몇 팀 감독 물망에 올랐지만 실제 계약까지는 가지 않았다. 김경문 감독도 하마평에만 오르내릴 뿐 5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선동열 전 감독은 SK와 도장 찍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졌다. 김재박 전 감독은 이제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시리즈는 1년 차 KIA 이범호 감독과 2년째를 맞은 삼성 박진만 감독의 40대 사령탑 대결로 펼쳐졌다. 젊은 감독 전성 시대가 열린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통계와 첨단 기술, 정보로 무장한 구단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야구계에 새로 유입된 브레인들은 야구는 선수가 하고, 감독이 팀 성적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며, 감독의 역할은 통념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프런트는 자신들이 추구하고 계획하고 설계한 야구를 그대로 그라운드에서 구현할 감독을 찾았다. 그러자면 젊고, 최신 정보에 깨어있고, 프런트와 잘 소통하는 초보 감독이 제격이었다.

개중에는 원로 감독의 강한 에고와 장기집권 독재, 소통 불가에 지쳐서 정반대 스타일의 감독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작년 KIA처럼 성공했고, 어떤 구단들은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처음엔 성공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달라진 구단도 있었다. '초보 감독은 안 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경험 많은 지휘관을 찾는 팀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프로팀에서 오래 일한 한 야구인은 "구단들이 찾는 감독 스타일에도 유행이 있다"고 했다. "다른 팀들이 젊은 감독, 데이터에 밝은 감독,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면 왠지 모르게 그게 좋아 보이고 '우리도 해볼까'라는 심리가 작용한다. 그러면서 리그 전체에 트렌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프런트 픽' 감독들의 연쇄 실패가 가져온 반작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모 지방 구단 관계자는 "구단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감독 선임 프로세스는 대개 두 가지"라며 "때로는 구단주의 선호가 보다 강하게 작용할 때도 있고, 프런트의 의견이 좀 더 반영될 때도 있다. 프런트 픽이 실패로 돌아가서 감독을 바꿀 차례가 되면, 새 감독은 거의 100% 구단주 픽으로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반대로 구단주 픽이 실패하면 다음엔 구단에서 추천하는 감독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금은 여러 구단의 프런트 픽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구단주 픽' 차례를 맞이한 상황이다. 그런데 구단주가 무명 코치나 야구계 숨은 젊은 인재까지 속속들이 알긴 어렵다. 아무래도 구단주는 누구나 알 만한 빅네임, 여러 차례 우승 경험이 있는 거물급 감독,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스타 사령탑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실제 김경문, 염경엽, 김태형, 이강철 감독 선임에는 구단주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테랑 사령탑은 베테랑만의 장점이 있다. 류선규 전 SSG 단장은 "초보 감독이 처음부터 잘하긴 쉽지 않다"고 했다. 감독의 역량에서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감독도 처음 팀을 맡으면 구단과 선수단을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감독 업무 자체가 처음일 경우, 첫 시즌 전체를 비싼 수업료로 치르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감독은 실제로 시켜봐야 아는 자리다. 초보 감독이 어떤 야구를 보여줄지는 감독 본인도 모른다. 감독을 잘할지 못할지도 시켜보기 전에는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코치 시절 모두가 '감독감'으로 인정한 인물이 막상 감독이 돼선 실망만을 안겨준 사례가 적지 않다. 반대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감독이 의외로 '감독 체질'이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측 가능성이 최대 장점

이렇게 예측불허인 초보 감독과 달리 검증된 베테랑 감독의 야구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노장 감독을 둘러싼 호평과 좋은 소문은 대부분 사실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물론 감독에 대한 '악명'도 죄다 사실이었음을 함께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 한 지방 구단 관계자는 "감독의 능력이 달라봐야 얼마나 다를까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정말 다르긴 하더라. 투수 기용, 선수단 관리, 동기 부여 등에서 경험 많은 감독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며 "굳이 말을 하지 않는데도 선수들이 알아서 감독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걸 보면서 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고 했다.

프로 구단에서 오래 일한 한 야구인은 "팀이 잘나가고 모든 게 잘 풀릴 때는 감독의 중요성을 모른다. 하지만 부상자가 나오고, 팀에 위기가 찾아오면 그때 경험의 진가가 나온다"고 했다. 2020년 NC 우승을 이끈 이동욱 전 감독은 "결국 야구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며 "사람에 대해 알고, 사람을 많이 경험해봐야 감독도 잘할 수 있다. 선수들이 움직이게 하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게 리더의 역할"이라고 했다.

마침 올해 KBO리그 환경도 경험 많은 지도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올시즌 리그 OPS는 0.716으로 지난해(0.772)보다 투고타저 경향이 뚜렷하다. 7개 팀이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하고, 3위와 7위의 승차가 3경기 차에 불과할 정도로 전력 평준화와 치열한 순위 싸움이 펼쳐지는 중이다.

이런 환경에선 1점이라도 더 '짜내는' 작전, 한 점차를 지키기 위한 투수교체 등 감독이 개입할 공간이 넓어진다. 여기에 피치클락 시행으로 경기 템포가 빨라지면서, 순간순간 벤치의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중요해진 것도 원로 감독에게 나쁠 것 없다. 피치클락 시대의 야구는 감독이 결정을 못하고 허둥지둥 안절부절못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베테랑 감독이 비교 우위를 갖는 대목이다.

물론 베테랑 감독 기용이 무조건 능사는 아니다. 역대 최고 명장으로 꼽히는 김응용 감독과 김성근 감독은 말년에 한화 지휘봉을 잡았다가 하나같이 커리어를 망쳤다. 노장 감독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되며 팀도 개인도 망한 사례다. 현대 유니콘스 시절 찬란하게 빛났던 김재박 감독도 LG에선 실패했다.

젊은 감독 에너지 필요할 때도

경험 많은 지도자가 필요한 팀이 있고, 그들이 필요한 상황이 있다. 오랜 리빌딩을 끝내고 이제 성적을 내야 할 한화와 롯데는 그런 감독이 필요했다. 반면 팀에 따라서는 젊은 감독의 신선한 에너지가 필요할 때도 있다. 초임 사령탑의 참신한 발상과 활기찬 리더십이 선수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기도 한다. 지난해 KIA 이범호 감독이 그랬다. 만약 지금 각광받는 원로 감독 중 하나를 작년 KIA 더그아웃에 데려다놨다면 과연 통합 우승이 가능했을까. 모르는 일이다.

'감독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우리 야구가 감독들에게 충분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감독 목숨이 파리 목숨인 KBO리그 문화에서 초보 감독이 노장 감독이 될 때까지 계속 살아남아 기회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역대 KBO리그 감독 가운데 통산 1000경기 이상 출전한 감독은 단 14명, 이 중 현역은 김경문·김태형·염경엽 세 명뿐이다. 이들은 감독 경력 초기에 우승이나 가을야구 등 큰 성공을 거두고, 이후 지속적으로 성공을 이어가면서 '명장' 반열에 올랐다.

반면 감독 데뷔 초기엔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좌절을 겪고 야인이 된 감독도 적지 않다. 2020년 NC 우승 사령탑 이동욱 감독, 2022년 SSG 우승을 이끈 김원형 감독은 우승 이후 2년 안에 경질됐다. 둘 다 성적보단 다른 사정이 작용했다. 이동욱 감독은 선수들과 코치진의 잇따른 사건사고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김원형 감독은 구단 내 '어른의 사정'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류선규 전 단장은 유튜브 방송 '닥터류의 월요진단'에서 "김경문·염경엽·김태형 감독은 공통점이 있다"면서 "세 감독 다 다른 팀에서 감독을 해봤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들 세 감독은 저마다 큰 성공도 해보고 실패와 좌절도 겪었다.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서 더 단단해졌고 깊이가 생겼다. 그리고 어렵게 다시 주어진 기회에서 전보다 발전한 모습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타 구단에서 우승을 경험한 뒤 와신상담 기간을 거친 이동욱·김원형 감독도 두 번째 기회에선 더 크게 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다. 새 감독을 찾는 팀이라면 이들 감독 후보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감독에게 필요한 경험에는 반드시 '성공'의 경험만 포함되지 않는다. 쓰라린 실패와 좌절, 배신으로 눈물을 흘린 경험도 필요하다. 베테랑 감독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