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심층취재 추적+
예스24 사태로 본 e북 논쟁 2편
모호해진 소비자 전자책 소유권
해외에선 민감하게 다루고 있어
반면 국내법은 유명무실해
‘e북 사용권’ 분명하게 고지해야
# 우리는 지난 1편에서 예스24의 해킹 사태를 약간 다른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수천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기업의 서버가 속절없이 해킹당한 게 가장 큰 문제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모호해진 '소비자의 권리'도 생각해볼 부분이었습니다. 서버가 다운되면서 예스24에서 e북(전자책)을 산 회원들이 책을 읽지 못하는 불편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산 건 e북이 아니라 'e북 접근권'이었던 셈입니다.
# 이 사실을 아는 소비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는 '사기 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릴 지도 모르고요. 이런 이유로 해외에선 소비자 권한을 명확하게 하는 규제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예스24 사태로 본 e북 논쟁' 2편입니다.
e북 이용자의 대부분은 e북 파일이 아닌 'e북 사용권'을 구매한 것이다.[사진 | 뉴시스]
지난 9일 발생한 예스24 해킹 사건은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회원만 2000만명이 넘는 홈페이지가 일주일 가까이 '먹통'으로 돌변하면서 예스24를 즐겨 쓰던 소비자들이 큰 불편에 시달렸죠. 예스24를 통해 티켓 판매를 진행하던 몇몇 오프라인 행사는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예스24의 주요 서비스 중 하나인 e북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예스24 서버가 멈추자 회원들이 자신의 구매한 e북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e북 소유권'을 두고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돈 주고 산 책이 때에 따라선 '내 것'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누리꾼 사이에서 퍼져 나갔죠.
[※참고: 이런 문제가 생긴 건 예스24를 포함한 e북 판매기업들이 회원들에게 e북 파일이 아닌 'e북 접근권'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1편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예스24가 이런 사실을 숨긴 건 아닙니다. 예스24의 이용약관 제8장 제19조(e북 서비스)를 함께 보실까요. "e북은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는 서비스고, 소비자는 회사가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북은 콘텐츠 제공자(작가)로부터 사용 권한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e북 이용권'을 판매했다는 거죠. 하지만 소비자가 이 약관을 일일이 살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해외에선 어떻게 = 이런 디지털 소유권 문제를 해외에선 꽤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예전에 예스24와 비슷한 사례를 겪은 바 있어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2009년 7월, 글로벌 전자상거래 플랫폼 아마존은 자사의 e북 서비스 '킨들'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동물농장」을 원격으로 삭제했습니다. 두 소설의 저작물 권한이 없는 판매자가 e북을 판매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물론 해당 e북을 구매한 소비자는 모두 환불을 받았습니다만, 논란의 여지까지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아마존이 소비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콘텐츠를 삭제했다는 점 때문이었죠. 아이러니하게도 두 책 모두 정보 통제와 독재를 풍자하는 소설이었다는 점도 논란을 일파만파 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이례적으로 공식 발표를 통해 "우리의 문제 해결 방식이 멍청했고(stupid), 생각이 없었다(thoughtless)"며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또 앞으로는 소비자의 사전 동의 없이 콘텐츠를 삭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죠.
[사진 | 뉴시스]
애매모호한 디지털 소유권을 법으로 명확히 한 지역도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는 지난해 9월 '디지털 상품 구매법'을 제정했습니다. 이제 올해부터 캘리포니아에서 게임·음원·e북 등 디지털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플랫폼은 '구매' 혹은 '매수'란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또 소비자에게 자신이 구매한 콘텐츠가 모종의 이유로 사용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도 고지해야 합니다. 소비자가 콘텐츠가 아닌 '콘텐츠 사용권'을 사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는 게 이 법안의 취지입니다.
유럽연합(EU)에선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2019년부터 일찌감치 '디지털 콘텐츠 지침'을 제정했습니다. 이 지침은 '소비자에게 디지털 콘텐츠의 소유권이 없다'고 못 박진 않았습니다만, 디지털 콘텐츠 거래가 콘텐츠 접근권이나 사용 권한을 기반으로 하는 계약임을 명시하고 있죠.
■ 유명무실한 국내법 = 물론 '표현 방식을 바꿀 뿐인 규제'가 디지털 소유권 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완벽한 대안이 될 순 없습니다. 그저 소비자의 혼동을 막는 데 그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이런 논의조차 구체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문제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는 '콘텐츠이용자 보호지침'을 시행하고 있긴 합니다. 제7조(계약체결전 정보제공의무)에 따르면 사업자는 콘텐츠에 관한 정보를 적절한 방법으로 표시하거나 알려야 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e북 플랫폼은 소비자에게 e북이 아닌 'e북 사용권'을 판매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하죠. 하지만 이 지침은 어디까지나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인 탓에 강제력이 없습니다.
업계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이은희 인하대(소비자학) 교수는 "정부에선 e북도 책으로 보기 때문에 도서정가제를 적용했다"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같은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면 실물 책과 마찬가지로 e북도 소비자에게 소유권이 넘어오는 게 맞다고 본다. 소비자가 정당한 권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 도서정가제는 책의 정가를 정하고 10% 이상의 할인을 금지하는 제도입니다. 2014년 국회 본회의를 통해 시행안이 통과했습니다.]
[사진 | 뉴시스]
업계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소비자의 권한이 제한된 상황인 건 맞다. 만약 e북 플랫폼이 당장 서비스를 종료하면 모든 회원의 e북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저작권을 보호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불편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지금처럼 DRM을 적용한 판매방식을 지키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이번 예스24 해킹 사태는 소비자의 권리에 본질적인 고민을 던지고 있습니다. 소유의 개념이 흐려진 지금, 소비자는 언제든 소유의 권리를 잃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언제까지 이 논의를 미룰 생각인 걸까요.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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