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SSG 랜더스의 추신수가 지난해 11월 7일 인천 연수구 경원재 앰배서더 인천에서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 은퇴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14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추신수의 은퇴식이 열렸다. 촉촉해진 눈으로 마이크를 잡은 추신수는 "이제 선수로서의 열정은 1도 남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열정이 피어나고 있다"면서 "우리 랜더스 선수들을 뒤에서 돕겠다. 선수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뛰도록, 한국 야구와 랜더스에 보탬이 되겠다"고 밝혔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타자이자 '추강대엽' 서열 1순위 선수, 메이저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둔 레전드가 은퇴 후에도 한국야구와 SSG를 위해 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은퇴 뒤 야구장보다 골프장, 예능 촬영장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한국야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훈수하는 몇몇 전직 선수들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계속 야구를 위해 일하겠다는 선언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은퇴 소식에 비난 댓글 왜?
다만 추신수의 포부가 실제로 이뤄지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자신을 향한 한국 야구팬, 특히 SSG 팬들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돌리는 과제다.
솔직해지자. 한국야구가 자랑할 만한 대선수이고 놀라운 커리어를 쌓은 스타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추신수는 야구팬 사이에 인기가 없다. 그 엄청난 통산 기록과 이름값에 비하면 열광적인 지지 팬덤이 크지 않다. 오히려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여론, 심지어 비판 목소리가 더 도드라지는 분위기다. 일례로 은퇴식 소식을 알리는 구단 공식 소셜미디어(SNS) 게시물은 비난 댓글로 가득했다. 은퇴식 기사엔 '화나요'가 압도적이었고 유튜브 영상 댓글도 대부분 비판과 욕설로 채워졌다. 야구팬 커뮤니티에선 은퇴식 자체가 큰 화제가 되지 않는 분위기였고, 일부 올라오는 게시물도 긍정적인 내용은 별로 없었다.
물론 이런 온라인 여론이 극소수 극성맞은 팬들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반적인 선수 은퇴식 때 온라인상 반응을 생각하면 이런 분위기는 분명 이례적이다. 야구팬들 사이엔 암묵적 규칙이 있다. 호불호를 떠나 오랜 시간 프로 무대에서 뛴 선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은퇴식 주인공을 향해 누가 비난 글을 올렸다간 오히려 손가락질받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추신수 은퇴식에선 그런 자정작용이 작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퇴식이 진행된 랜더스필드 밖에는 일부 팬들이 보낸 근조화환이 줄지어 서기도 했다. 근조화환에 쓰인 문구는 추신수를 향한 민심이 악화된 가장 직접적 이유를 짐작게 했다. 화환에는 "메이저리거 선한 영향? 현실은 가족 끼워팔기" "팬 무시하는 인맥 구단 박정태 김성용 해명하라" 등의 내용이 채워져 있었다. 구단의 김성용 전 단장 재영입, 박정태 퓨처스 고문 영입을 비판하는 내용들이었다.
김성용 전 단장은 2022년 취임 당시부터 비선실세 논란에 휘말렸고 김원형 전 감독 경질, 김강민 2차 드래프트 파동 등으로 팬들의 비난을 받다가 사퇴했다. 그러나 5월 초 스카우트팀장으로 조용히 재취업해 활동 중이다.
박정태 고문은 과거 3차례 음주운전과 만취 상태에서 버스운전 방해로 물의를 빚었다. 지난해 12월 퓨처스 감독으로 선임됐다가 논란이 거세자 한 달 만에 자진사퇴했다. 그러나 최근 다시 퓨처스 고문으로 돌아왔다.
SSG 팬들은 이들 논란의 인사 재영입에 추신수가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론적으로 김성용과 박정태는 일반적인 프로야구단이 할 수 있는 인사가 아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고, 데려왔다간 비난 여론이 불보듯 뻔하다. 만약 구단 차원에서 이런 인사를 진행했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자는 모기업으로부터 질책받고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애초부터 구단 윗선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인사다.
게다가 한 번 문제가 돼서 내보냈던 인사를 몰래 다시 불러들이는 건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 두 인사 임명 과정에서 프런트 실무자 상당수는 반대와 우려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이 한 일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은 구단주, 아니면 구단주로부터 전폭적 신임을 받는 실세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현역 시절부터 구단주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은퇴 후에는 구단주 보좌라는 초유의 직책을 받은 추신수에게 시선이 쏠린 배경이다.
이런 의심을 추신수 스스로 인정하는 발언도 나왔다. 한 보도에 따르면 추신수는 "(김성용) 복귀는 내가 제안했다. 결정은 구단이 했다"고 대답했다. 이어 "(내) 개인 이미지를 생각했다면 그런 제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의 장점만 생각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구단 내에선 추신수가 일부러 뒤집어썼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의혹을 사실로 인정한 셈이 됐다.2022년 4월 9일 정용진 SSG 랜더스 구단주(오른쪽)가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2022 신한은행 SOL 프로야구 SSG 랜더스와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 관람에 앞서 추신수와 만나 포옹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불공정 인사 의혹
박정태의 경우 구단에선 "추신수와는 무관한 인사"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보통 이런 사안에선 사실 여부는 둘째 문제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 다른 유능한 지도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추신수 외삼촌'이란 것 외엔 SSG와 어떤 인연도 없는 인사를, 그것도 논란이 불보듯 뻔한 인사를 두 번이나 임명했다면 아무리 부정해도 추신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만약 추신수가 팀의 상징적 선수이자 팬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는 '까방권' 보유자였다면, 이런 논란에도 옹호하는 여론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신수는 SSG 팬들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다. 상호간에 '라포'가 형성될 만한 기간도 부족했고 기회도 없었다. SSG 팬 대부분은 신세계가 SK 야구단을 인수해 창단한 뒤부터 추신수를 응원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최근 유입된 신규 야구팬들은 추신수의 MLB 시절 활약은 본 적도 없다.
사실 추신수 자체가 박찬호, 류현진과 비교해 국내 팬층이 두터운 선수가 아니었다. 또 광저우 아시안게임 이후로는 대표팀 활약도 거의 없다 보니 전국민적 응원과도 거리가 멀었다. 미국 시절 음주운전 사건의 주홍글씨도 남아 있다.
SSG는 창단 이후 추신수를 구단 레전드로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추신수의 위상과 마케팅적 가치를 생각하면 그 노력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초반엔 추신수도 성적은 물론 팀 내에서 리더로서 좋은 역할을 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 나갔다. 팀도 2022년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차지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 구단의 이미지 메이킹과 주입식 레전드 만들기 시도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논란과 문제가 생기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SSG 구단에선 '비선실세' 논란으로 시작해 류선규 단장 경질, 김성용 단장 선임, 김원형 감독 경질 등 부정적 이슈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구단주'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품었다. 추신수와 동갑인 프랜차이즈 스타 김강민은 2차 드래프트로 '버림받고' 한화로 이적해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반면 구단주와 가까운 추신수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사태를 거치면서 추신수에 대한 예우는 점점 특별대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구단에서 추신수의 선행을 홍보할수록 오히려 '귀족'처럼 보이는 역효과가 났다. 이숭용 감독은 지난해 페넌트레이스 5위 결정전에서 한 점 차 뒤진 9회초 1사 후 추신수에게 마지막 타석을 보장했다. 추신수는 어깨 부상으로 스윙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은퇴식에선 에이스 김광현이 등판 날짜를 바꿔서 추신수 은퇴식날 선발 등판했다. 여러 사건과 정황이 더해지고 쌓여 그간 소문과 추론의 영역에만 존재했던 추신수 실세설, 로열패밀리설, 만물추신수설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SSG에 겨우 4년 몸담은 선수는 귀족 취급을 받는데 프랜차이즈 선수들은 홀대받는다는 볼멘소리가 팬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추신수가 결자해지해야
한 번 굳어진 프레임 앞에 사실관계는 둘째 문제다. 미운털이 박히면 뭘 해도 미워 보인다. 팬들은 추신수가 은퇴사에서 롯데 팬을 먼저 언급했다고 비난했다. 이날 경기 중계방송에서 5이닝 동안 객원 해설자로 등장한 것도 비난 소재가 됐다. '친구' 김강민을 팔아치운 책임자를 자기 입으로 다시 데려왔다고 인정한 것도 역린을 건드렸다. 이러다 나중엔 숨만 쉬어도 비난받을 분위기다.
SSG 구단도 이 험악한 분위기를 모르지 않는다. 한 관계자는 "외부에서 우려하시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추 보좌 본인도 알고 있다"며 "앞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지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본인도 정말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 원정 경기, 아마추어 야구와 2군 경기도 보러 다니고 선수들과 구단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쓴다"고 감쌌다.
추신수가 계속 지금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건 한국야구에 불행한 일이다. 추신수는 한국야구에 귀한 자산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다만 현재의 냉랭한 여론 지형에선 그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고, 오해만 커지는 상황이다. 지금과 같은 여론 지형이 지속된다면 향후 추신수가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비슷한 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추신수를 감독으로 임명했을 때 팬들이 김성용, 박정태처럼 반응한다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결자해지해야 한다.
결국 팬들이 분노하는 문제 인사들의 정리가 우선순위다.
구단 내 역할의 재정의도 필요해 보인다. 구단주 보좌 역할의 범위와 한계를 보다 명확히 하거나, 아예 다른 형태의 기여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에 대한 의구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팬들과의 관계 회복은 더욱 장기적인 과제다. 일방향 홍보보다는 진솔한 소통이, 화려한 이벤트보다는 묵묵한 실천으로 다가가야 한다. 미국야구 경험을 활용해 한국야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영역을 찾아, 조용히 성과를 쌓아가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접근법이다. 추신수 본인과 구단이 함께 지혜로운 해법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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