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병 2주기…진상규명 노력 3인의 이야기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의 상관 명예훼손 및 항명 혐의 결심 공판이 열린 지난해 11월21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 앞에서 아프지말고다치지말고무사귀환 부모연대 회원들이 박 대령 뒤에 서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날’과 달리, 찌는 듯한 폭염에 강물은 가물었지만 ‘위험’은 직감할 수 있었다. “내성천이 모래강이라 발이 푹푹 빠졌습니다. 분명히 발목 높이였던 물이 한 발짝만 디뎌도 허리로, 몇 발짝 더 움직이니까 머리까지 쑥 차오르더라고요.”

정원철 해병대예비역연대 회장은 채 상병 순직 1주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해 8월, 부러 채 상병이 목숨을 잃은 경북 예천 내성천에 몸을 담갔다. 채 상병 특검법이 두번째로 윤석열 전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에 가로막혔던 때다. 해병대 군복 차림으로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본회의장에 몰려가서 울고, 거리에서 격분해도 소용없었다. “이 모래강에 안전장비 하나 없이 병사를 투입한다니요. 그런데도 담당 지휘관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어요.”

2023년 7월19일 오전 9시, 채 상병은 상부 지시에 따라 경북지역 집중호우로 인한 실종자를 ‘바둑판식’(바닥을 찍으며 하는 수색)으로 수색하다가 급류에 휩쓸렸다. 구명조끼를 비롯한 안전장비는 착용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라고, 생애 마지막으로 외쳤다. 14시간 뒤 실종 장소로부터 400여m 떨어진 곳에서 유해가 발견됐다. 그의 죽음을 두고 이후 벌어진 책임 회피와 수사 외압은 정권을 뒤흔드는 격랑이 됐다. ‘격노’하며 진상규명을 막으려 한 의혹을 받는 전직 대통령과 가담한 정부 기관, 군 장성들은 특검 수사를 받고 있다.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며 외압을 버틴 한 사람, 박정훈 대령의 항명 혐의는 무죄로 확정됐다.

채 상병 사망 2주기를 앞두고 청년 병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요구해온 세 사람을 만났다. 채 상병 사망을 계기로 결성한 해병대예비역연대의 정원철 회장, 군대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 모임인 ‘아프지말고 다치지말고 무사귀환 부모연대’(아말다말) 회원 조윤아(가명·56)씨, 채 상병 사건이 정권 차원의 문제임을 밝히고 박정훈 대령의 곁을 지켰던 군인권센터의 방혜린 국방감시팀장이다.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풍경 앞에서, 이들은 채 상병과 닮은 숱한 병사의 죽음들을 언급했다. 군 조직의 신조여야 할 ‘원칙’은 왜 ‘빽’(연줄) 앞에 힘을 잃는지, 부당한 명령 앞에서 상식적 사고는 어떻게 멈추는지, 군인의 생명은 어째서 여전히 한없이 가벼운지 내내 생각했다고 했다. 2년의 우여곡절 속에 그나마 희망의 실마리 하나는 건져냈다고도 덧붙였다.

해병대원들이 2023년 7월19일 경북 예천에서 실종자 수색 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채 상병을 찾고 있다. 연합뉴스

닮은 죽음들

아말다말 회원 조윤아씨가 “부들부들 떨며” 생전 처음 대통령실 앞 기자회견에 나선 건 채 상병 사망 10개월여 뒤인 지난해 5월 벌어진 육군 12사단 훈련병의 사망 때문이었다. 가혹한 군기 훈련을 받다가 숨진 훈련병 이야기에, 다른 부모들과 밤새 잠 못 이루며 대화하다가 결심했다. 그로부터 하나하나 앞선 병사의 죽음을 되짚었다. 황당한 지시, 무방비한 죽음, 은폐, 가벼운 처벌이 닮아 있었다. 그 이유는 채 상병 사망과 관련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경북경찰청 탄원서 가운데)라고 정의했잖아요. 그런 존재로 여겨지는 거였어요.”

수많은 군대 내 가혹행위, 군인의 부상과 사망 사건을 다뤄온 방혜린 팀장은 “군대에는 지시가 내려오면 어떻게든 해치워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안 되는 일은 안 된다고 상부에 보고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무능으로 평가되다 보니 무리하게 밀어붙인다”고 지적했다. 위험을 알리는 현장 군인들의 호소에도 임 사단장 지시라며 이행된 위험천만한 내성천 수색은 그 적나라한 단면이었다.

숨죽인 전우

채 상병의 죽음만큼 그 죽음을 대하는 비상식적인 태도가 큰 상실감을 안겼다. 정원철 회장은 “사고가 터졌으면 원칙대로 처리했으면 될 일이었다”며 “군은 사단장을 보직해임하고, 군사법원법에 따라 경찰로 이첩해 죄가 있는지를 따지면 됐다”고 했다. 원칙을 생각하면 복잡할 리 없는 사건 처리가 맥 없이 왜곡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정 회장은 우선 해병대 전우회부터 찾았다. ‘나설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심지어 대통령 ‘빽’까지 나타난 상황이었으니까요.”

해병대 대위로 전역한 방혜린 팀장도 권력 앞에 숨죽인 군대에 갑갑함을 전했다. “전우, 전우 늘 외치는 조직이었잖아요. 우리 조직에서 사망 사건이 있었다면 책임의 경중을 떠나서 모두가 떠안고 갈무리해서 다음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건데, 조직 내에서 고개 숙이는 사람 한명이 없는 상황이 특히 참담했습니다.”

살아 있었다면 채 상병이 전역했을 지난해 9월26일, 포항버스터미널에 나가 동기들에게 추모 메시지를 받으려던 정 회장은 다시 한번 좌절했다. 추모 공간을 찾은 동기가 1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알게 됐다. 채 상병, 그리고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들려던 사람들의 노력이 헛된 것만이 아니었다.

정원철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장이 지난해 6월24일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관사인 서울 영등포구 소재 아파트 앞에서 채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임 전 사단장의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탄원서를 읽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병사의 목숨

지난해 12월3일 불법 계엄이 선포된 밤, 그 아수라장에서 조윤아씨 눈에 들어온 건 시민에게 사과하는 장병들이었다. “소모품처럼 취급당하던 젊은 장병들이 이 명령이 맞는 것인지, 나름대로 판단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였어요.” 자연스럽게 박정훈 대령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항명죄’를 뒤집어쓴 채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명령이 맞는 것인지 물었던 사람이었다. 약속을 지킨 사람이었다.

박 대령은 그로부터 한달여가 지난 1월9일,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1심 무죄 선고를 받았다. 세 사람을 비롯해 시민 여럿의 축하 속에서 채 상병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정의이고 법치를 살리는 것”이라고 박 대령은 말했다. 채 상병 특검의 항소 취하로 지난 9일 마침내 박 대령 무죄가 확정됐다. 정원철 회장은 “박 대령은 위법하거나 부당한 지시에는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 그 과정은 험난했지만 끝내 무죄가 확정되면서 군 조직에 이정표를 남겼다”고 말했다.

채 상병의 죽음, 그리고 2년 동안 군대와 세상이 완전히 탈바꿈했다고 세 사람은 믿지 않았다. 목숨을 잃은 채상병은 돌아올 수 없고, 나아갈 길은 아직 멀다. 다만 한 병사의 목숨, 그 앞에 원칙적인 태도의 중요성은 확고히 이정표로 자리 잡았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