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84제곱미터>
[안치용 영화평론가]
▲ [84제곱미터] 욕망의 거미줄 한가운데 걸린 남자의 영혼을 끌어모은 몰락 영화에선 이 위기가 조장된 것으로 밝혀지고 누명을 벗기 위해 우성이 몸부림칠수록 거미줄은 더욱 그를 휘감는다. 스릴러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인공이 온갖 위협을 이겨내고 진실을 밝혀낸 게임의 승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84제곱미터'에 희생양 이론을 적용한다면 우성은 이 거미줄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그가 결코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됐다. 그의 승리란 것이 상위 포식자 간의 싸움에 얼떨결에 끼어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에 불과하며, 트로피는 없다. 복귀라는 결말은 김태준 감독이 대중적 스릴러물에 사회비판과 실존적 허무를 채색한 영화적 장식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울림을 줄까. #84제곱미터 #강하늘 #김태준 #국민평형 ⓒ 안치용의 시네마 인문학 |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영화 제목이 왜 '84제곱미터'일까. '평' 단위가 익숙한 과거 세대에게는 84㎡가 전용면적 기준으로 25.7평에 해당한다. 아파트 분양 시에 시행사는 복도, 계단 등 공용면적을 포함한 공급면적(분양면적)으로 아파트 유형을 표기하기에 통상 32~34평형 (분양)아파트의 실제 면적이 '84제곱미터'이다.
이 면적 주택을 국민주택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 한국 정부는 주택난 해소를 위해 1인당 적정 주거면적을 기준으로 주택법에 '국민주택 규모'란 말을 만들었고, '국민주택 규모'는 전용면적 85㎡ 이하라고 못 박았다. 이 면적이면 4인 가구가 방 3개, 거실, 주방 등을 갖추고 쾌적하게 거주할 수 있겠다는 정책 판단이었고, 사실상 정책 의지였다. 이러한 정책 배경에 따라 84㎡ 면적 아파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많이 공급되고 분양되게 된다.
욕망의 기준선
지금은 국민주택이란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국민평형이란 용어가 일반적이다. 일상이나 언론 보도에서 국민주택이라는 정책 용어보다 시장에서 통용되는 국민평형이란 말이 더 자주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 정책이나 제도의 수행을 대표하는 것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아파트라는 쪽으로, 즉 공급자보다 수용자 중심으로 의미가 형성되는 미묘한 변화 때문이 아닐까.
국민주택이라는 단어에는 국민국가가 정책 대상으로서 국민에게 최소한의 주거를 보장하겠다는 복지 선언이 담겼다. 이 용어가 국민평형으로 바뀐 것은 당연히 단순히 용어의 대체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국민주택에서 초점이 대상으로서 '국민'이었다면, 국민평형에서는 그것이 선호로서 '평형'으로 전환한다. 동시에 개념의 수치화가 확고해진다. 주택보다는 주택 면적에 방점이 찍힌다는 얘기다. 주거가 보편적 권리에서, 사회가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어떤 삶의 표준이자 성취해야 할 '욕망의 기준선'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집은 복지가 아니라, 사회적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자격이다. '84제곱미터'는 최소 기준을 충족했다는 1차 관문이다. 수치화와 함께 시장화의 논리가 당연히 강력하게 개입한다. 영화 < 84제곱미터 >는 여기서 출발해, '내 집 마련'이라는 소박하고 합당한 꿈이 어떻게 한 개인을 파괴하는 악몽으로 변하는지를, 젊은 세대를 잠식한 '영끌'과 '빚투'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스릴러의 문법으로 추적한다. 블랙코미디 성격을 가미해서 그렇다고 영화가 너무 으스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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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제곱미터 포스터 |
ⓒ 넷플릭스 |
'영끌'과 '빚투'의 사회상
퇴직금을 중간 정산하고, 원룸 보증금에 최대로 받은 대출, 엄마의 마늘밭까지 팔아서 우성(강하늘)은 서울에서 내 집 마련에 성공한다. 제목대로 84제곱미터 아파트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는 패티 킴의 노래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영끌족 우성의 서울 입성이 성공한다.
행복도 잠시, 이자 갚느라 허리가 휘고, 기대와 달리 집값이 점점 내려가기만 한다. 퇴근 후에 알바를 뛰며 금융비용을 대고 에어콘마저 틀지 않는 절약으로 근근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데, 녹초가 된 몸을 누이면 설상가상으로 밤마다 쿵쿵거리는 층간 소음이 우성을 괴롭힌다. 억울한 것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도 자신이 층간 소음의 진원으로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 누명을 벗기 위해 우성은 층간 소음의 원인을 찾아 위로, 위로 향한다. 같은 동의 맨 위층인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는 입주민 대표 은화(염혜란)와 윗집 남자 진호(서현우)를 만나며 영화가 본격적 소란으로 접어들며 관객에게 볼거리를 뚜렷이 한다.
영화의 설정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의 예시처럼 보인다. 딱 들어맞는 예시이지만 전형적이지는 않다. 84제곱미터를 향한 우성의 열망의, 지라르가 말한 중개자(Mediator)는 옆집의 누구, 준거집단의 아무개 같은 특정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국민평형'이라는 사회적 기준이 만들어낸 가상의 평균적 국민을 중개자로 상정하는 듯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표준화한 주거 기준은 어느새 "이 정도가 되기가" 너무 어려운 허위의 평균이 되며 욕망의 평균이란 중개자로 승격된다.
우성의 꿈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욕망이라기보다, 미디어와 사회가 끊임없이 전시하는 이 추상적 중개자, 즉 '가상 국민'의 욕망이다. 과거 성실한 직장인이 월급을 모아 마련한 내 집, 말하자면 국민주택이 발산하는 온기가 사라지고 대신 '가상 국민'의 기준평형을 충족하고자 하는 탄탈로스적 욕망이 만개한다.
우성의 이런 욕망은 지라르 '모방 욕망'의 확장 개념이다.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자기-초월적 시스템이 가장 강력한 중개자로 작동한다는 견해다. 영화에서 제시된 '국민평형'은, 우성과 같은 보통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거대한 추상적 중개자인 시장의 욕망이다.
이 매개자의 지배력이 워낙 압도적이고 어떤 빈틈도 허용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욕망의 원천을 끊임없이 내재화하여 시장의 목소리를 자신 안에서 급기야 자신의 목소리로 듣는다. 일반화한 타자(Generalized Other)는 사실상 없는 타자지만 군림하는 타자로서 전체주의의 '하나' 개념과 동일하다. 환청이지만 공공연하게 모두에게 울려 퍼진다. 사회 구성원은 욕망을 욕망하도록 한 기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욕망이 아닌 욕망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인식한다. 욕망을 미시적 관계에서 거시적 구조 차원으로 파악하는 더 심화한 관점의 논의가 영화의 기층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개념 구조가 탄탄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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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제곱미터 스틸사진 |
ⓒ 넷플릭스 |
사다리 끝에는?
이제 주택은 GTX 개통과 같은 정책 변수에 따라 가격이 요동치는 투기 대상이 되었기에, 우성은 내 집의 안락함이 아닌 주택가격의 변동성에 주목하여 '영끌'과 '빚투'를 감행한다. 그에게 이 공간은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증표이자, 치열한 사회적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았다는 안도의 상징이다. 이 달콤한 욕망의 사다리 첫 칸에 발을 올려놓음으로써 행복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성이 들어선 곳은 행복의 공간이 아닌 말 그대로 '감옥'이었다.
영화는 우성이 욕망의 사다리에 진입하였다고 하여도 결코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없음을 냉정하게 폭로한다. 아파트가 점점 더 고층이 되며 수직적 형상을 노골화한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펜트하우스는 더 크고 더 냉혹한 탐욕을 상징한다. 그곳에 사는 입주민 대표 은화는 최상위 거주와 함께 자산 가치 증식을 욕망한다.
영화가 그리듯 은화의 욕망은, 우성의 분투를 집값과 관련한 시장 요인으로 파악하며 만일 그것이 잠재적 리스크로 판단되면 제거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탐욕이 가능한 까닭은 은화가 영화의 아파트 단지에서 최상위 포식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성과 은화 사이에 탐욕의 차이는 없다. 욕망의 크기가 비대칭적인 게 아니라, 정보와 자산의 비대칭성이 탐욕의 실현 강도를 좌우한다. 게임의 규칙이 불공정하기에 정보와 자산이 부족한 서울의 '국민평형'을 꿈꾸는 보통 사람은 결국 상위 포식자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현실을 은화와 우성의 격차가 보여준다.
정체불명 윗집 남자 진호는 다른 종류의 탐욕에 휩싸였다. 자본주의를 완전히 벗어난 유형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분명 약간은 다르다고 할 욕망이 작동한다. 그의 원초적이고 파괴적인 욕망은 은화의 욕망과 다른 종류이기에 두 욕망은 마침내 충돌한다. 같은 종류의 욕망이었다면 욕망의 위계로 정렬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없을 테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다 거미줄을 친 두 마리 거미처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
이 중첩된 거미줄 한가운데에 우성이 있다. 그는 걸린 줄도 모르고 덧없이 날개를 흔드는 한 마리 파리에 불과하다. 쿵, 쿵 울리는 층간 소음은 거미줄의 미세한 떨림이며, 포식자의 접근을 알리는 신호다. 이 소음은 공포와 불안이 만들어낸 심장박동 소리다.
여기서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겠다. 아파트 전체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공동체의 불안은 위기를 해소할 희생양을 찾는 방향으로 폭력성을 분출한다. 층간 소음의 원인 제공자를 찾으려는 군중심리는 가해자를 찾는 행위를 넘어서 불안과 위기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물색하는 집단적 폭력의 광기이다.
관객이 짐작하듯 영화에선 이 위기가 조장된 것으로 밝혀지고 누명을 벗기 위해 우성이 몸부림칠수록 거미줄은 더욱 그를 휘감는다. 스릴러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인공이 온갖 위협을 이겨내고 진실을 밝혀낸 게임의 승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 84제곱미터 >에 희생양 이론을 적용한다면 우성은 이 거미줄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게임은 처음부터 그가 결코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됐다. 그의 승리란 것이 상위 포식자 간의 싸움에 얼떨결에 끼어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에 불과하며, 트로피는 없다. '복귀'라는 결말은 김태준 감독이 대중적 스릴러물에 사회비판과 실존적 허무를 채색한 영화적 장식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울림을 줄까. 18일 공개.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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