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붉은>
[문현호 기자]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이 한마디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92년 작품 <붉은 돼지> 그저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순한 범주를 넘어, 삶에 찌들고 지친 어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이자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만났을 때, 저는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풋내기였습니다. 그때는 포르코 롯소라는 돼지 주인공이 왜 그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저 역시 "뇌세포가 두부가 된 중년 남자"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이 영화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년 생일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보는 루틴이 생긴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진홍빛이 품은 깊은 의미
영화의 원제인 '紅の豚'에서 특히 인상 깊은 건 '붉을 홍(紅)'이라는 글자입니다. 일반적인 '赤'가 아닌 '紅'이라는 표현이 쓰였고, 영어 제목도 'Red Pig'가 아니라 'Crimson Pig'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작은 차이는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정서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포르코는 단순히 새빨간 돼지가 아닙니다. 그의 색은 전쟁과 상실, 고독과 책임이라는 세월의 농도 속에서 점점 진해진, 그래서 더 아름다운 진홍빛입니다. 젊은 시절의 그가 맑은 '빨강'이었다면, 이제는 시간의 무게를 품은 '붉은' 존재로 완성된 것이지요. 이 영화가 끝없이 여운을 남기는 이유도 어쩌면, 그 붉음이 단순한 색이 아니라 시간의 맛을 지닌 빛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붉은 돼지>를 "삶에 찌들어 뇌가 두부가 된 중년 남성들을 위한 만화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전형적인 '주인공 서사'의 공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잘생기지도 않고, 우락부락한 근육도 없으며, 영웅적인 활약도 드물지만, 이 '돼지'는 묘하게 멋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심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도, 심지어 돼지의 모습이 되어버려도, 여전히 멋질 수 있다는 다정한 선언. 그 멋이란 결국 겉모습이나 성취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포르코 롯소의 일상을 따라갑니다. 멋을 잃지 않는 하늘 위의 전투, 옛 연인 지나가 운영하는 호텔 위를 지나가는 낭만적 비행, 그리고 당찬 소녀 피오와의 뜻밖의 동행까지. 영화는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서, 어른들의 삶에 남은 상처와 여운, 그리고 여전히 꺼지지 않은 희망을 천천히 펼쳐 보입니다.
포르코는 완벽한 영웅이 아닙니다. 과거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가고, 때때로 무너지고, 젊은 비행사에게 패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그를 더욱 깊이 있는 인물로 만듭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돼지>는 중년의 로망으로 가득한 영화입니다. 하늘을 가르는 복고풍 비행기, 지중해의 쨍한 햇살,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로맨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자유로운 삶. 그러나 이 모든 장면들이 허황된 판타지로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로망을 꿈으로만 남기지 않고, 삶과 조화롭게 이어 붙이는 감독의 시선 덕분입니다.
포르코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진 채 하늘로 떠올라 삶을 바라보는 인물입니다. 고독하면서도 자유롭고,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그의 시선은, 어쩌면 중년이라는 시기를 가장 시적으로 묘사한 초상화인지도 모릅니다.
조 히사이시의 음악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선율 하나하나가 장면의 숨결이 되고,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흐르며, 관객의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영화를 여는 時代の風(시절의 바람)〉은 중년이라는 계절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쓸쓸하면서도 품위 있는 멜로디로 시작을 알립니다. 그리고〈帰らざる日々(돌아갈 수 없는 날들)〉은 지나간 시간과 감정에 대한 깊은 회상을 담아, 마치 마음속 오래된 항구에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묵직하게 울려 퍼집니다. 그 선율은 상실과 체념, 그러나 여전히 꺼지지 않은 기억의 잔불을 조용히 어루만집니다.
포르코와 피오가 함께 비행기를 조립한 뒤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는 'Bygone Days'가 흐르며, 과거의 상처를 품은 채 새로운 도약을 감싸안습니다. 또한 공중전에서는 경쾌하고 유쾌한 리듬이 더해져, 단순한 싸움이 아닌 '멋'을 아는 어른들의 장난 같은 전투를 연출해 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흐르는〈時には昔の話を(때로는 옛 이야기를)〉는 일본 포크의 전설 카토 토키코가 힘 있게 부르는 곡입니다. 그 담담한 목소리는 영화 속 여운을 가져와, 오래된 기억 위에 조용히 손을 얹고, "가끔은 옛이야기를 꺼내도 된다"고 다독이는 듯합니다.
조 히사이시의 음악은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합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들리는 감정,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여백의 미학. <붉은 돼지>가 긴 시간 동안 우리 곁에 남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음악들이 마음속 가장 조용한 곳에서 계속 울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끝나지 않는 여운
<붉은 돼지>를 본 후는 묘한 여운이 남습니다. 마치 오래된 와인을 음미한 후의 기분과 같달까요. 달콤하면서도 쌉쌀하고, 그리운 듯하면서도 희망적입니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모습이 변해도, 삶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도 여전히 멋지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멋은 외모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매년 생일 주간에 이 영화를 찾아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포르코 롯소가 더욱 깊이 이해되고, 그의 멋이 더욱 빛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돼지>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날 수 있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 안의 로망과 멋을 잃지 않는 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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